[장편소설] 빛의 여정 110화

장편소설 빛의 여정 110화 / 10장 아나트라의 흔적

by 포텐조

장편소설 빛의 여정 110화 / 10장 아나트라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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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의 거인들이 첫 전투에 신이 났는 지 근처에 얼어죽은 나무들을 모조리 싹쓸이 하여 가져온 뒤 공성추를 만들기 시작했다. 헤르논 수도원에서 로이딘이 라베스트리아의 위치를 파악한 바로 그 날 금요일에 다른 한 쪽에선 아디일라의 첫 번째 공성추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디에프 성을 겨누면서. 그간 숙영지에서 따분하여 수행원들과 친위대원 몇 명만을 데리고 자신이 정복한 인근 땅들을 둘러보며 산책을 즐기고 있던 피네로에게 굼뜬 거인들의 작품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자 허겁지겁 전장을 복귀한 피네로는 전군 돌격 전에 힘을 아끼고자 디에프 성주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디에프 성주여. 그대의 충성심은 충분히 증명되었다. 보아라! 사방으로 너흴 포위한 나의 병사들을. 너희들은 빠져나갈 곳이 없다. 그럼에도 친히 내 마지막 자비를 베풀터이니, 항복하라. 항복하지 않으면 모조리 남김없이, 전투에 굶주리고 허기에 굶주리며 피에 굶주린 나의 전사들에게 너희 모두 산 채로 씹어 먹게 하리라."


디에프 성주는 화살로 날아온 피네로의 서신을 받고 큰 고민에 빠졌다. 디고를 향해 보낸 검은 비둘기는 보내도 답장이 오지 않고 있었다. 답장이 온다 한들 그리 희망적인 메시지는 올 것 같지 않았다. 항복하면 살 순 있어도 침략에 맞서는 첫 번째 관문의 수장으로써 저항없이 항복한 것에, 오명이 죽지 못해 사는 자처럼 계속 따라 붙을 것이다. 백성들은 기력이 없었고 곳간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싸워도 이길 가망이 없으며 편지대로 함락되면 무슨 짓거리를 할 지 모르는 야만인들이기 때문에 도무지 어찌 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는 계속 고민했다. 시간이 잠시 지난 후. 하는 수 없었다. 이래나 저래나 죽을 것 같으니 그냥 싸우다 죽자.


디에프 성에서 화답의 화살을 보냈다. 사정거리 내에 디에프 쪽 서신을 기다리던 아디일라 보병들은 성주의 답변이 날아오나 싶었다. 헌데 날아오는 화살이 그 중 한 병사의 가슴팍에 꽂혔고 그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동료를 쳐다보다가 픽하며 쓰러졌다. 이윽고 성 안에서 소나기같은 화살들이 공중으로 쏘아지다가 성벽 아래로 맹렬히 날아오기 시작했다. 선봉에 있던 아디일라의 병사들은 당황하며 뒤돌아 도망치려 했으나 등 뒤에 여러 발이 꽂힌 채 앞으로 쓰러졌고 화살을 피해 얕은 강가로도 도망쳤지만 이 마저도 소용없어 잠시 후 화살이 꽂힌 차가운 시신의 등이 봉긋 수면 위로 떠올랐다.


숙영지까지 날아온 화살을 보며 격분한 피네로가 자신의 칼을 뽑아들었다. 뿔나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고 대기하던 전 군이 대열을 갖추고 공성추를 맞은 편 성문에 맞추어 배치한 후 돌격을 감행했다. 거인들이 공성추를 만들 동안, 병사들이 그간 사다리를 만들어서 성벽을 올라 갈 준비를 해둔 상태였다. 사다리를 들고 가는 장정들을 보호하는 전사들이 가죽 방패를 들고 디에프 성으로 달려갔다. 남쪽을 제외한 북쪽, 동서쪽에 몰린 군대가 사다리를 성벽으로 들이밀려 했다. 디에프의 병사들은 활을 쏘았고 계속 쏘았다. 아까운 기름등잔을 깨뜨리며 사다리에 기름을 뭍히고 불화살로 쏘아 불타게 만들었다. 동쪽의 성벽에 첫 사다리가 성벽에 닿았고 병사들이 사다리들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디에프에서 가장 신경써서 지키던 창고인 이그네움 창고를 개방했다. 얼마 남지 않은 이그네움을 모조리 바깥으로 끌어와 성 안 마당에 쌓아놓고 성벽 위로 조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국 조병창에서 개발한 대형 석궁인 발리스타를 성벽 곳곳에 이미 배치해놓고 있었기 때문에 발리스타의 화살에 이그네움 가루가 담긴 주머니를 묶어 달고 화살촉에 기름을 묻혀 불을 붙였다. 주머니쪽으로 불이 옮겨붙으면서 가까이 가기 조차 힘든 맹렬한 불꽃이 주변 공기를 빨아먹고 있었다. 손잡이를 돌려 장전한 후 떼로 모인 아디일라의 군세에 쏘아보냈다. 그러자 커다란 화살이, 모여서 대형을 이루었던 병사들의 방패 중 하나에 제대로 꽂히면서 삽시간에 주변에 불똥을 튀었다.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주위가 지옥불이 되어 난리가 나며 비명소리와 함께 대형이 와해되었다. 그렇게 여러 대의 발리스타가 순차적으로 쏘면서 아디일라의 군대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적들이 사다리로 올라오자 이젠 백병전을 시작해야 했다. 아디일라의 일반 전사들은 갑옷도 빈약하고 방패도 가죽을 씌운 갑옷에 철로 된 무기는 도끼 뿐이었지만 죽음이 뭔지 모르는 괴물들 같았다. 악바리같이 표현 그대로 개처럼 짖으며 달려오는 전사도 있었다. 이에 반해 디에프 병사들은 아보테 왕국군의 무장에 철판을 덧댄 좋은 갑옷을 입고 강철 검과 강철 창을 소지한 채 맞서며 괴물들을 쓰러 뜨렸다. 허나 쪽수에서 압도적으로 밀렸는데 전사 하나를 쓰러뜨리면 뒤에 있던 전사 두 명이 달려오는 식이었다.


디에프의 병사들은 물러나면 끝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막아보려 애를 쓰며 온갖 함성소리와 창칼이 부딪히는 소리, 고통으로 울부짖는 소리 그리고 시야를 가리는 연기까지 피아식별이 안되는 와중에도 이그네움을 가루로 급히 빻아 항아리 토기에 넣고 불을 붙여 던졌다. 성벽 전체가 불의 고리처럼 이그네움의 불길이 타원형을 이루며 사방으로 타올랐다. 이그네움 기름탄(유탄)이라 불리는 무기는 아보테 왕국이 이그네움을 채굴하고 정제과정을 거치면서 얻어낸 훌륭한 부산물 중 하나였다. 토기인 항아리가 땅바닥에 깨지면서 이그네움의 불이 순식간에 주변 아디일라의 전사들을 집어 삼켰다. 그들은 살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다가 결국 성벽 아래로 추락했다.


근접전에서도 나름 선방하고 있어서 디에프 군대는 성벽 안쪽으로 후퇴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쿵!"하는 소리가 울리자 귀에 민감한 몇몇 병사들은 식은 땀이 흐른 채 놀란 표정으로 성문을 바라보았다. 쿵쿵대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면서 성문 쪽 병사들이 오만 악 소리를 내면서 다들 와서 막아달라 부탁했다. 디에프의 성주는 급히 성문 쪽으로 성벽에 있던 병사들을 빼내어 보내려 했지만 이미 거인들의 장난감은 성문을 박살냈다. 뚫린 성 안에 죽음의 한기인지 세찬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사람 키 높이의 두 배만한 거인들이 방망이를 들고 디에프 성문 안으로 몰려들어갔다. 성문 인근에 있던 병사들은 방망이에 휘둘려 저 멀리 날아가거나 아니면 거인의 발차기 한 번에 의식을 잃어버렸다.


가뜩이나 없는 병력이 성벽에서 후퇴하여 마당까지 내려 가서 거인들을 막아내려 했지만 성벽으로 넘어온 무수한 전사들과 강물이 흐르듯 성문으로 들어오는 군대를 이젠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점차 좁혀오는 거리와 죽어나가는 디에프의 병사들. 민간인들도 맞서 싸우고자 대열에 합류했지만 그들도 이미 모두 쓰러져버렸다.

마당 한 켠에 마련된 이그네움 조각더미와 두 손가락에 꼽는 병사 그리고 성주만이 유일한 생존자였다.

성주가 병사들과 눈 짓을 주고 받더니 서로 끄덕이며 작별인사를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적들에게 돌격하지 않고 대신 한 가운데 모여둔 이그네움에 가지고 있던 횃불을 모두 던져 넣었다.


피네로는 숙영지에서 공격을 지켜보다가 성 중앙에서 높이 솟은 불길에 잠시 놀랐다. 그리고 맹렬한 불이 성 안을 뒤집어 놓기 시작했고 성 밖으로 아디일라 병사들이 뛰쳐나오거나 성벽에서 내려오는 등 살기 위해 몸부림 쳤다. 모든 것들을 불태워 버리면서 전투는 끝이 났다. 디에프 사람들, 자신들의 손으로. 피네로는 쟁여둔 이그네움을 원했으나 이미 성주는 그것들과 같이 산화해버렸다.



111화에서 계속...

"때가 차매 그 빛이 다시 솟아나리라"

(매주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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