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일기 벽돌시리즈 180
성장일기 벽돌시리즈 백 팔십 번째
설 명절을 보내고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나는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하고 왔다. 공휴일, 명절, 주말 등등 빨간 날은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똑같이 마음을 설레게 만들거나 적어도 잠시 눈을 붙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 준다. 1년에 한 번 찾아오는 금쪽같은 빨간 날이 내겐 중고등학교 시절 모든 것 그 자체였다. 방학은 종교였다. 항상 학교 가기 싫고 중학교 때는 폭력을 당하고 고등학교 때는 뜨거운 경쟁의 열기 속에서 그냥 항상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대학교 시절의 빨간 날은 과제 그리고 출석에 지쳐 잠시나마 꿀 같은 시간이고 동기부여가 딱! 접신(?)하는 날이기도 했다. 대게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끝나는 학기말에는 참혹한 성적표를 받아 들고 당장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학기 중의 빨간 날은 뭔가 새롭게 해 보자라는 느낌적인 느낌을 가졌었다. 또 시간이 많이 남아 심적으로 여유로워서 도서관에 가서 자기 계발서를 읽으며 조만간 열심히 무언가를 해볼 의지를 다지는 시간을 보냈다.
당연히 다음날 학교를 가게 되면 이 모든 다짐, 서약, 맹세, 나와의 약속은 불가침조약 위반하듯이 거창하게 A4로 뽑은 동기부여문구는 방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손바닥 뒤집듯 해야 할 것에 매달리느라 무얼 해볼 심적인 여유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면 마음속으로 "나중에 하지 뭐"라는 생각이 이제는 너무 많이 해서 인식하기도 전에 스쳐 지나가 첫 부분이 까맣던 영어단어책은 어느새 다시 책장을 덮고 뒷전으로 밀려났었다.
쉬는 날이 휴식과 여유를 준다는 점에서 정말 좋은 날이지만 마치 일시적인 진통제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시 현실의 답답함을 잊기 위한 술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개그콘서트 끝날 때 밴드의 소리가 모든 이의 가슴을 다운시키며 우울하게 만들듯 개그콘서트를 볼 때는 재밌는데 다시 얼마 남지 않은 내일로 돌아가야 하노라면 자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좋든 싫든 해는 기울고 다시 떠오르기 때문에 바득바득 나갈 수밖에 없다.
이런 반복적인 사이클에 자각을 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면 평생을 돈만 보고 달려온 퇴직자가 "내가 뭣하러 지금까지 이 고생을 했나"라는 생각으로 연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변화하거나 극복하거나 성장하려 한다면, 결국 어느 시점에서 반드시 절대적으로 결정해야 할 시기가 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은 하기 싫고 무섭고 짜증 나고 하니 도무지 엄두가 안나는 것도 맞기에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근데 여기서 결단이라는 것이 어느 순간 회사의 사직서를 던진 채 부동산을 알아보러 다닌다는 큰 변화도 있을 수 있지만 어느 때와 똑같은 일상에서 오늘 당장 무언가를 준비하는 작업도 결국 변화로 칠 수 있다. 큰 변화도 있지만 작은 변화도 분명 변화가 맞다. 이를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될 것이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삶의 행적이 다져놓은 길이 있는 데 그것을 한큐에 뚝딱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상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나에겐 답답하고 따분하고 귀찮고 얼른 집에 들어가서 쉬고 싶다는 키워드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반대로 재미나고 아기자기하고 도전의 연속이 되는 나날이라고 생각하기에 마음이 보다 편안하다. 빨간 날만 바라보고 대부분의 일상의 나날은 무시한 채 보내다 보면 매 순간이 그냥 한숨만 나올 때도 있다. 그래서 일상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는 가능성을 발견하는 아주 좋은 환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