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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주는 것이 들어주는 것이다.

대학원생의 성장일기 23

by 포텐조

벽돌 시리즈 이십 삼 번째

이어폰을 안 쓰는 사람이 없다. 다들 하나씩 가지고 있고, 거의 모든 활동에서 이어폰을 착용한다.

심지어 직장에서 일하는 도중 이어폰을 쓰다가 동료의 말이 안 들리는 문제까지 이슈화되고 있다. 신기하게도 개인의 음향장비가 널리 보급되면서 일상에서의 소리들은 듣지 않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 사이트에서 장르를 고르고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이내 하루종일 듣는다. 운동할 때도 공부할 때도 듣는다. 그렇지만 타인의 의견은 듣지 않는다.


극적인 비유로 들어 과장한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우울감과 대인기피를 겪는 사람들이 나날이 증가하면서 그 사람 안에서 울리는 이야기들을 듣는 시간이 없어진 것 같다. 몇몇 칼럼에서는 사회가 극단주의화 되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도 지금의 상황을 비추어 볼 때 연관성이 있지 않나 싶다. 사람들은 각자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걸 풀어내면서 남들이 들어주길 바라고 공감해 주면 큰 힘을 얻는다.


물론 상담사들이 아니고서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듣는 건 지루하고 쓸데없다. 뻔한 이야기들, 다 아는 이야기들. 하지만 누군가는 본인의 이야기를 용기 내서 꺼내면 이 또한 수많은 소리에 묻혀 잡음처럼 지나가버린다. 내가 무슨 녹음기냐면서 듣기만 하는 건 싫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말이 너무 많아지는 건 때론 그 사람의 이야기가 가벼워질 수 있고 자칫 신뢰를 잃어버릴 수 있다. 아무 말 없다가 갑자기 한마디 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더 귀에 잘 들리는 것도 같은 이치다.


처음 만나는 모임, 그리고 함께하는 시간에서 수동적인 면이 있어 그냥 듣기만 하는 사람도 있다. 근데 이게 듣는 건지 아니면 그냥 멍 때리며 끄덕이는 건지 조금씩 말하는 이도 깨달을 수 있다. "영혼이 없어요?"

반대로 어색하다고 이 상황을 이겨내려 말을 많이 하는 경우도 있는 데 듣는 이는 내가 뭐 하러 지금 이러고 있나 싶기도 한다. "아니 내가 무슨 신문고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증진하고 그 사람과 라포를 형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는 듣는 것에서 출발한다. 관심 가져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심리치료가 된다. 실제로도 2004년 연구에서도 백단위가 넘어가는 수많은 심리치료의 공통요소는 라포형성에 있었다. 관계를 형성하는 것. 대화는 핑퐁이며 티키타카이다. 하지만 그전에 앞서 듣고자 하지 않으면 최저시급으로 노사가 모여 열띤 언쟁을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가정이 화목하지 못한 건 때론 누군가의 고집일 수 있다.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건 때론 나의 고집일 수 있다.

더 나아가 사회가 건강하지 못한 건 듣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다. 서로 잘났다 떠들면 결코 나아갈 수 없다.

자기 PR의 시대라지만 그것도 때에 따라 해야 하는 건 아이들도 알 것이다. 누군가 힘들어하는 건 그의 이야기를 아무도 안 듣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이어폰을 떼고 소리를 들어본다. 잡음이 들려오고 시간이 지나면 심지어 불안하기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음악이 편안함을 가져다줬는데 어느새 자극이 안 들어와 의식이 과잉되어 별의별 생각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의 목소릴 들을 수 있는 여건도 생긴다.

흔히 인간관계를 동행이라고 한다. 동행하려면 뒤처지는 누군가를 위해 도와줘야 한다. 일으켜 세우기도 해야 한다. 그리고 힘든 짐을 같이 들어줘야 한다.


오늘 글의 제목이 같은 뜻을 반복한 게 아님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 사람 영혼의 소리를 "들어"주는 것이 무거운 짐을 "들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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