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의 성장일기 22
벽돌 시리즈 이십 이 번째
"철수야, 선생님이 11일은 날씨가 비 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맑음으로 체크해 왔네?"
"에?... 아..." 방학 끝나기 하루 전 빨리 끝내기 위해 모든 날씨는 맑음으로 통일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짬밥이 늘어(?) 간간히 흐림이나 비 온 것을 체크해 준다. 완벽한 자연스러움이라 생각하지만 이내 선생님 앞에서는 표정까지는 커버 치지 못한다.
다들 각자 일기들을 쓰는지 궁금하다. 초등학교 때 잠깐 쓰던 원형 시간표와 일기들은 다들 써보았을 것이다.
라떼는 그랬는데, 요오즘 2000년대 태어난 젊은이들은 어떤지 궁금하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이제는 뒤늦은 일기숙제를 안 해도 되니 편하긴 했는데, 고난의 시간을 보내니 이제는 살고 보자는 답답한 마음에 쓰게 된 지 어언 8년이 넘어간다. 일기들이 쌓이고 쌓여 24권째 쓰고 있으니 조선시대 규장각이 부럽지 않다.
내 일기의 특징은 백지 그 자체에 아무런 양식이 없다. 그렇기에 오랫동안 쓸 수 있었던 비결이다. 줄 친 공책이나 가죽양장의 다이어리에서 본듯한 캘린더와 칸들이 만들어져 있는 것은 오히려 내가 자유롭게 쓰는 것을 방해하고 더 쓰고 싶어도 칸을 벗어나니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욕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낙서도 하고 감성이 솟구치는 밤이면 캘리그래피인가 그것도 해보고 싸인도 써본다. 물론 연습장 마냥 혹사시키지는 않는다. 그런 표현은 글 쓰는 도중에 나오지, 몇 장을 소비하며 남발하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책들을 읽으면서 인상 깊거나 배워야 할 문장을 그대로 적으며, 그것을 내 나름대로 삶에 적용해 보고자 설계하고 하루를 보내며 써갔다. 그렇지만 지금 살펴보면 그때의 시대상을 반영하듯 아주 빽빽하게 쓰인 것을 보면 내가 그만큼 불안하고 강박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이내 생각하면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벗어나지 않았고 이겨내지도 못했다. 즉 다윗과 골리앗에서 나는 골리앗인 양만 많은 속 빈 강정의 일기를 쓰며 원하는 바를 달성하지 못했다.
근데 그렇게라도 했으니 지금의 내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가끔 듣는 칭찬은 "생각이 깊다"거나 "애늙은이 같다"는 것인데 그런 과정을 거쳤기에 그런 칭찬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다. 그런데 동전의 이면이 있듯 어쩌면 내 생각이 최고라는 특별함 내지는 선민의식을 강화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기를 쓰면서 나와 대화했기에 결국 메아리의 끝은 나의 목소리만 들렸기 때문이다.
여하튼 나의 특별함은 나의 특성과 창의력을 지키고 성장시키는데 도움은 되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도 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는 말을 그래도 기억하고 살려고 한다. 겸손함이 자의든 타의든 이미지 관리나 나 스스로에게도 필요한 덕목이다. 그래서 모임을 하면서 멤버들의 발제와 생각을 들으면서 문득문득 창피하거나 나를 반성하고 오히려 배우게 되는 점도 크다. 그래도 삐뚤어지지 않고 용케 잘 자란(?) 20대 후반인 나란 사람은 어쩌면 심리학이 나와 함께 했기에 나를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지금도 가끔 자랑하고 다닌다. 8년이란 기간 동안 24권의 일기를 썼다는 점. 각 한 권당 일반 노트가 아닌 제본 노트로 120페이지 정도 되는 두께여서 보이는 양으로도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말할 사람이 없기에 일기와 이야기를 나눈 것을 보면 애처롭게 생각할 수 있으나 이제는 자부심이 되었다. 그리고 내 일상의 컨트롤 타워가 되었다. 종교이야기를 꺼내면 호불호가 갈리고 조심스러우나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다.
"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그러므로...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고린도 후서 12장 9~10절"
성경 한번 읽고 잘난 척하려던 내가 한 2년 전인가 우연히 본 구절인데 마치 내 이야기를 함축해 놓은 거 같아 울컥하기도 했다. 여하튼 과거의 아픔이 지금의 자랑 혹은 힘이 되어 가는 것이 신기하기도 기쁘기도 심지어 감사하기도 한 것 같다.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일기의 가장 큰 장점은 기록을 통해 나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점이다. 솔직히 내가 쓴 일기를 다시 모두 훑어보지는 않는다. 그냥 쓰고 싶은 이야기나 생각을 적는다. 그렇지만 기록하는 그 순간만큼은 내 생각이 무엇인지 정립이 되고 정리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가끔 모임에서 이야기할 때 일기 쓰는 것을 강추한다. 요즘은 글쓰기로 돈을 벌 수 있고, 뭐 인플루언서가 된다고 하지만 그런 상업적이고 소비성 기록 말고(물론 그것 나름대로 좋긴 하지..) 진짜 나를 위한 기록을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변함없는 생각이다. 전에 서술했듯 경험은 나를 만든다. 하지만 그 경험을 실체화하여 감각을 통해 인지 시키는 것 또한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다. 인간은 감각을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는 동물이기에 시각 촉각 청각등을 통해 세상과 나를 인식한다.
명언팔이로 괜히 있어 보이고 싶지는 않지만 이 구절만큼 진짜 나를 기록하는 일기의 장점을 표현하는 구절이 없는 거 같아 적어본다.
"한 사람이 펜을 들고 글을 쓸 때까지 그 사람 내면에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수 천 가지 생각이 든다. (윌리엄 새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