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빛의 여정 16화 / 2장(우연인가 운명인가)
장편소설 빛의 여정 16화 / 2장 시작(우연인가 운명인가)
로이딘의 잠긴 의식 안에선 그 자신이 어딘 지 모를 곳에 서 있었다. 순식간에 나타난 빛이 그의 모든 감각을 적시며 다가왔다. 그 빛을 맞이하는 순간 귀가 찢어지는 소리가 머릿 속을 울렸다. 로이딘은 급히 눈을 뜨고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모닥불 옆에 누워 있었다. 굉음의 출처는 호위병이 아침 기상으로 자신들의 방패를 악기 삼아 연신 두들기며 사람들을 깨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충혈된 눈을 뒤로 한 채 누워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라며 고함을 질러댔다.
로이딘은 일어났음에도 계속 요란을 떠는 모습에 짜증이 났지만 묵묵히 짐을 정리해야 했다. 어제와 같은 빵과 약간의 물이 주어졌고 물 주머니를 돌려가며 사람들은 빵을 적시고 있었다. 마차에선 짐을 다시 실어나르고 있었다. 노예는 없으리라던 네이즈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몇몇 사람들은 호위병의 반쯤 강요로 인해 마차에 짐을 나르고 일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며 힘이 없었고 빵과 물만 바라보며 대기 하고 있었다. 지난 밤 다행히도 혹시 모를 소란으로 잠 깨는 일은 없었다. 도주하는 이도, 저항하는 이도 없었던 모양이다.
남녀가 분리되어 줄로 맞춘 행렬 중 여성들이 따로 모여 지낸 곳에선 저 멀리 루네의 모습이 보였다. 로이딘은 내심 아는 척하고 싶었지만 전혀 반가울 분위기가 아니였으므로 조용히 빵을 뜯고 있었다. 반면 시테온은 로이딘과 가볍게 목례를 하며 무리 지어 수풀로 가서 볼일을 보고 있었다. 시테온은 후드를 쓰고 있었으나 안에 숨긴 게 있는 지 살폈을 법도 한데 가지각색의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있다보니 호위병들은 모른 채하고 내버려 두었던 것 같다. 자가베의 복장만 봐도 이미 체념했을 것이다. 루네가 두른 털 옷이 내심 부러웠다. 자기가 손수 잡은 동물의 가죽을 마음 껏 입고 다니는 반면 로이딘은 털 조끼 하나로만 마르고 닳도록 만족해야 했으니까.
로이딘과 같은 모닥불을 쓴 동료들이 아침 식사를 하고 나니 어느새 출발 명령이 떨어졌다. 2일차 행진이 시작되었다. 다시 줄을 맞추고 양 쪽으로 호위병들이 배치된 채 나란히 걸어가며 사람들을 감시했다. 마차는 가장 뒤쪽에 배치되어 호위병들의 시선을 방해하지 않았다. 마부는 피곤에 절은 표정으로 말을 몰았다. 달그락 거리며 수레바퀴가 움직였고 말들은 아침에 마차 안에 있던 마른 풀을 먹고는 힘을 내서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도착한다면 늦은 오늘일까? 내일 일까? 끝이 궁금한 로이딘은 빨리 걸으면 금방 도착하기라도 한다듯이 마음으론 재촉였지만 실제로는 걸음을 맞추며 걷고 있었다.
네이즈는 아침에 호위병들 그리고 사제와 함께 아보를 향해 예배를 했다. 그의 자주색 스톨(사제들이 걸친 앞으로 길게 늘어뜨리는 천)이 그가 고위 성직자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로이딘은 자주색의 천을 두른 사람은 오로지 불씨 운반자나 아보의 사제들 밖에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크리네스 족장이자 장로인 크리네스 4세와 아르한도 갈색 혹은 흰색, 아주 희귀한 때에 입는 붉은색 예복 말고는 자주색을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로이딘은 발칙하게도 만약 여기있는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면 자신은 네이즈의 옷부터 노려야겠단 상상을 하고 있었다.
지루하고 따분한 계속된 걷기가 이어지고 새벽을 견딘 이들에게 다시 세찬 추위가 담긴 바람이 불어왔다. 지난 밤 얼어죽은 사람은 다행히 없을지라도 모두가 얼굴이 퉁퉁 부었고 초췌한 모습으로 산 송장처럼 걷고 있었다. 비단 사람들뿐만 아니라 호위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옆에 있던 자가베의 모습은 벌에 쏘인 게 아닌지 궁금할 정도로 퉁퉁 부어있었다. 호위대는 마차에서 넝마같은 큰 천을 꺼내 같이 덮게 하거나 그 마저도 잘려나간, 상체만 덮을 정도의 저질 가죽같은 것들을 나눠주며 어젯밤 추위로부터 사람들의 목숨을 유지시켰다. 그 천 쪼가리중 하나는 이틀 전 네이즈 일행이 핏빛늑대에게 기습을 당했을 때 찢겨나간 마차의 덮개도 포함되었다. 아침이 되자마자 얄짤없이 사람들을 기상시키고는 바로 걷어가 버렸다.
깊은 새벽의 추위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른 아침부터 부단하게 움직이던 행렬은 크리네스 마을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언덕과 얼마 없는 나무들로 이루어진 평지를 넘나들며 북쪽으로 향했다. 하늘은 높게 떠 있고 울먹이는듯 한 흐린 구름이 대지를 장식했다. 아직 점심이 되지 않았을 무렵에는 로이딘의 눈에는 더 이상의 수레바퀴 흔적이나 사람들이 오고 간 흔적이 느껴지는 깊이 파인 도로는 보이지 않았고 앞서 걷고 있는 사람들의 발에 치여, 흩어져 버린 작은 돌들만을 밟고 있었다. 달리 보면 상단들이 지나다니는 북쪽 길로 더이상 걷고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서쪽이든 동쪽이든 자연스레 방향 전환을 한 모양인데, 느낌 상 서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로이딘은 파악했다.
오전 내내 멈추지 않고 걸음을 재촉한 행렬은 해가 기온을 높이고 저 멀리 높은 산들 위로 떠올랐을 때 서서히 속도를 늦추었다. 마침내 정오가 되었는지 정지 명령을 내리고 모두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빵과 물이 다시 배분 되었다. 로이딘은 빵을 받기 위해 줄을 서있다가 시테온을 발견했다. 시테온은 덤불로 향해 볼일을 보러가고 있는 모양이다. 이번에 로이딘도 호위병에게 요청하자, 호위병은 귀찮음과 짜증섞인 표정으로 대충 끄덕이며 손 짓하며 보내주었다. 시테온 근처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앞서 걷고 있던 그의 뒤에서 로이딘이 인사했다. 시테온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이때 뿐일 것이다.
"오줌쟁이! 다시 만나네"
"뭐? 긴장하면 장난 아니라고!"
시테온은 웃으면서도 눈가엔 긴장이 풀리지 않은 듯 했고 조금 헬쓱해져 보였다.
"나 어디로 가는 지 알 것 같아"
"어? 지금 가는 곳을 안다고?"
시테온의 두 눈이 커지자 로이딘은 자신만이 알고 있다 생각하는 그 도착지를 목소리를 줄여 말해주었다. 그런데 시테온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로이딘은 내심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자 살짝 실망했다. 대신 아나티리캄의 무당이자 주술사인 "텝 오부자"를 준비하던 시테온의 빠삭한 정보가 나왔다. 그의 대답에 로이딘은 이미 폐허가 된 마을이 본인들의 도착지가 아님을 다시 알게되었다.
"순례자라면 인근에 크리네스의 만신전이 거기 있었나 보네. 그런데 돌을 줍게 된다고? 개소리도 그런 개소리가 따로 없군 그래. 불경하기 짝이 없어"
시테온은 네이즈가 말했던 돌을 줍는다는 표현을 곱 씹으며 침을 뱉었다.
17화에서 계속...
"때가 차매 그 빛이 다시 솟아나리라"
(매주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