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일기 벽돌시리즈 820
성장일기 벽돌시리즈 팔백 이십번째
어젯 글에선 마키아벨리의 용병 무용론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며 스위스 용병 사례를 반론으로 제시했다. 자, 믿고 쓰는 용병의 대명사 스위스 용병대들이 고용주와의 계약관계를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전통을 오늘날까지 바티칸의 근위대들에게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신성로마 제국군이 로마로 쳐들어오면서 교황의 목숨이 위험해지자 스위스 근위대 대다수가 전사하면서까지 맞서 싸워 교황을 안전하게 피신시켰다. 그 이후 감동받은 교황청이 스위스와의 영원한 용병계약을 맺게 되어(사코 디 로마 사건) 오늘 날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둘째, 용병은 부와 명성의 신분상승 통로였다. 이번에는 비잔티움, 동로마 제국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천년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동로마 제국은 오늘 날 뉴욕을 "The City"라고 세계 최고 도시의 자부심과 함께 대명사로 지칭하는 것처럼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도 그냥 "도시"라고 불렸었다. 모든 이들이 화려함과 찬란함 그리고 역동성에 홀딱 빠져서 살고 싶어하는 최고의 도시였으며 그곳엔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제국의 황제는 항상 고민이 많았다. 당시 지중해는 작은 바운더리 안에서 영주들끼리 땅따먹기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동로마제국은 그들과 달리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어 모든 것이 황제와 콘스탄티노플의 궁정에 집중되었으나 제국 내에서 정치적 술수를 동원하여 황제 한 번 해볼려고 도전하던 귀족들도 간간히 보였고 또 성공하기도 했었다. 이래서 귀족 내지는 영주들을 믿을 수가 없으니 황제는 자신의 권력에서 목숨까지 신경 쓸 게 한 두가지가 아니였다.
그러면 어떡하느냐? 믿을 사람은 집 안에 없으니 집 밖에서 구인을 해야했다. 귀족 반란이 일어났던 986년에 명군이지만 인망이란 1도 없는 우직하게 일만 하던 기계, 황제 바실리오스 2세가 당시 키이우(키예프) 루스에 지원 병력 헬프콜을 때린다. 그 후 지원군으로 오게된 루스인(동유럽), 스칸디나비아인들로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게 되고 본격적으로 이들은 황제의 바랑인(북유럽인 지칭) 친위대로써 고용되었다.
바랑기안 친위대들의 활약상은 베로이아 전투(1122)가 대표적이다. 로마를 괴롭히던 유목민 군대중 하나였던 페체네그 부족을 정벌하러 황제가 직접 제국군을 이끌고 나서게 되었다. 페체네그 족들은 모든 부족원이 하나의 가족처럼 움직이며 올인을 하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전략을 구사해 골치를 썩게 했다. 이들의 전술은 자신들의 짐들을 실고 다니던 수레를 놓고 방어 하며 기마병들이 적을 격퇴하는 식이었는데 제국군이 그들의 전술에 말려들어가게 되면서 황제는 결단을 해야했다.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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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 1 :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