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두 편의 미완성 원고가 있다. 하나는 10년 전 즈음 시도했던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1년 정도 쓰다가 작년에 놓아버린 원고다. 첫 번째 것은 추리 소설이었는데 중간에 주인공이 추리가 아닌 로맨스에 빠져 삼천포로 가버렸다. 그 이후 줄거리를 이어나갈 수 없어서 관두게 되었다. 돌아보면 흥미로운 소재였는데 당시 문서에 입력해 둔 비밀번호가 기억나질 않아 중단된 원고를 다시 열어보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작년에 그만둔 원고 스토리라인은 이전 보다 더 구체적이긴 했다. 하지만 이 원고를 쓸 때는 웬일인지 앞 장을 더 잘 쓰고 싶다는 생각에 스토리 전개보다는 퇴고를 많이 신경 썼다. 나는 70장 이후의 전개를 하다가도 매번 앞으로 돌아와 원고를 수정하기를 반복했다. 그렇다 보니 프롤로그를 기점으로 점점 맘에 들지 않은, 내가 볼 때엔 뒤로 갈수록 너무 미흡한 글이 되어버렸다. 그 원고 속에 등장인물을 사랑하기까지 했지만 전개를 하지 못한 채 일 년 가까이를 열어보지 못했다.
사실 다시 열어보기가 두렵기까지 하다.
원고 70장 즈음되면 고비가 온다. 이전에도 두 원고 모두 비슷한 시점에 놓아버렸다. 퇴근 후 신나게 착수를 하다가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 일들이 생겼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에 다른 장편을 쓰겠다는 시도를 못할 만큼 내 마음이 위축되어 버렸다. 의식적으로는 '그래, 뭐 그냥 시작한 것인데.' 라며 합리화를 해보지만 사실 속마음 깊은 곳에 배신의 감정이 생겼다. 오로지 이 일을 시작한 것도 나요, 마치지 못한 것도 나인데도 저 깊은 속마음에서는 내 열정을 배신해 버린 것 같은, 뭔가에 찔리는 마음이 느껴진다.
다행히 이번에 전자책을 만들어 보면서 '완성'에 대한 경험을 했다. 30장짜리의 회사 업무와 관련된 정보 전달용 글을 썼고 전자책 판매 사이트까지 올렸다. 그 과정이 얼마나 지난했던지... 그렇지만 이번에는 완벽하고 고결한 어떤 것을 만들어 내겠다는 욕심보다 그저 마무리를 짓겠다는 의지로 임했다. 아니나 다를까 중간에 고비가 찾아왔다. 나는 낑낑거리며 책상을 떠나려 하는 내 몸뚱이를 자리에 겨우 앉히고 나를 달래 가며 전자책을 마무리 지었다.
그것 참 다행이었다. 미완성 원고 하나가 더 생기지 않았으니 말이다.
어설프고 거친 그 글이 팔릴지 아닐지 알 수는 없지만 이 과정에서 완성에 대한 기쁨을 느꼈다. 이번에는 미완성 소설처럼 앞 장으로 돌아가 수정을 반복하지도 않았고 무엇인가 괜찮은 것을 쓰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뭐, 이걸 써서 돈 벌면 좋겠다 정도의 생각은 있었다. 그렇지만 이전보다 가볍게 착수하고 그래서인지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전자책을 마무리하고 나니 다른 것들을 새롭게 착수해 볼 마음이 생겼다. 미완성만 두 편이라는 마음속의 근심을 내려놓고 다시 열정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새로운 소설의 구상도 생각해 보고 공모전을 찾아보는 등의 새로운 것을 쓰자는 시동을 걸게 되었다.
어제 퇴근을 하며 들었던 팟캐스트에서 장항준 감독이 나왔다. 요즘 유명세가 많이 늘어서인지 스스로를 작가 지망생이라는 칭하는 사람들이 메일을 보내 자신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놓는 경우가 많단다. 얼마 전에 받았던 메일에서는 심지어 "감독님, 딱 한 번만 만나주시면 제가 생각하고 있는 시나리오를 다 말씀드릴게요. 2천만 관객을 불러올 수 있는 시나리오예요."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고 했다.
감독은 작가 지망생의 사정을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보통 어떤 고민을 하는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할 것이라고 본다. 실제로 주변에서 작가가 되겠다고 말한 사람들이 글을 쓰기 전 교육을 받으러 가고 뭘 공부하고 사전조사를 할 거라는 핑계를, 1년 뒤에 쓰겠다는 회피의 말들을 많이 한다고 했다.
감독은 작가가 되고 싶다고 메일을 보낸 사연자에게 특유의 유쾌함으로 이런 말을 전했다.
"나한테 좋은 시나리오 알려주지 말고 그냥 쓰세요. 써."
메일을 보냈던 그 사람에게 한 답장이지만 동시에 모든 작가 지망생들에게 해 준 공개적인 답장이었다. 확실히 내게도 딱 다가오는 말이었다.
작가가 되려면 결과가 바로 나오지 않아도 근면 성실하게 날마다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중간에 멈추지 않고 결국 마침표를 찍는 사람이 승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