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되는 연습장 / 1인칭과 3인칭
# 1인칭
어젯밤 본격적인 작가의 삶으로 살겠다고 결의를 다지며 유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한 여러 작가들의 인터뷰를 보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어느덧 오전 9시. 분명히 오전 8시에는 일어나자고 했었지만 이미 그 시간은 한 참 지났고 그냥 주말이니 한번 봐주자는 마음이 새록 돋았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베개를 세워 몸을 대충 세운 뒤에 한참 전 끝나버린 유퀴즈를 틀다가 지난밤 다 보지 못한 정치 대담을 본다. 정치권 뉴스를 드는 것이 내 오랜 일요일 아침의 루틴이다. 나는 일주일 동안 있었던 정치 뉴스를 들으면서 이불 정리를 마치고 바닥을 대충 닦은 다음에 머리를 몇 번 빗고 책상에 앉는다.
시끄러운 뉴스가 끝나자 마치 바통이라도 이어받듯이 포트가 '삐익' 하고 울린다. 이제 그만 일을 시작하라고 보내는 알림 종 같다. 그렇게 무엇인가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몸은 최대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버팅긴다. 번뜩 지금 내게 없는 것이 일요일의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 줄 공기라는 것을 깨닫고 창문을 활짝 연다. 그렇게 찬 공기는 아니다. 그래서 조금 열려다가 더 활짝 열고 내친김에 맞은편 방의 창문도 크게 열어준다. 언제부턴가 집 근처를 배회하는 아침형 까마귀가 깍 짖는다. '까아아악.' 그 소리 때문에 문을 닫을까 하지만 그냥 둔다. 그리고는 얼마 전 선물을 받은 인센스 스틱을 꺼내든다. 다행히 어제 라이터를 샀다. 금세 인센스 스틱에 불이 붙고 주황색으로 그 가녀린 몸체가 꺾이면서 은은한 연기를 내뿜는다. 약간의 탄 냄새와 함께 장미향이 방 안에 퍼진다. 그제야 좀 주말답다.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무엇을 가장 먼저 할까 하다가 공책을 펴 놓고 냉동고에서 쌀베이글을 꺼내든다. 앞 뒤로 30초, 총 1분을 정확하게 데운 후 아주 노력한 솜씨로 그것들을 조각조각 떼어내서 입 속에 넣으면서 어제 마감하기로 했던 소설의 원고를 꺼낸다.
소설의 살인사건이 진행 중이다. 베이글을 씹으면서 이 피해자가 어떻게 죽었을지 떠올려본다.
누가 그를 죽였을까? 왜 죽여야만 했을까?
그런데 어떻게 죽인 것일까? 죽인 사람이 여자라면? 그 사람은 어떻게 이 시신을 옮겼을까?
그러다가 최근에 읽은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 중에서 묘사된 살인 장면을 떠올린다. 내가 읽은 것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살인 장면이었다. 자살을 시도하려던 여자가 자신도 모르게 그만 자신을 살려내려고 도움을 주는 남자를 죽이게 되고 그가 죽자 갑자기 자살의 충동이 사라져 졸지에 더 삶을 갈구하게 되는 얘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장면은 정말 진해. 진짜 여운을 주는 장면이야.'라고 생각하다가 또 고개를 저으며 '으아. 근데 나는 밀란 쿤데라가 정말 싫어.' 라며 기겁을 했다.
나는 밀란 쿤데라를 좋아하면서 싫어하는 이 변태 같은 감정이 왜 생긴 건지 의아해하면서 커피를 끓인다. 그리고 한 잔 들이켠다. 다시 소설 쓰기에 착수한다. 그렇게 9시부터 11시 반까지.
# 3인칭
지미는 새로 문신을 했다. 어제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민을 친구들이랑 술을 진탕 마셨다. 왠지 기분에 문신을 한 팔뚝이 쓰리는 것 같았지만 특유의 태연함으로 별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미는 3시에 여자 친구랑 약속이 있다. 자주 가는 카페에서 여자 친구인 젤리가 기다리겠다고 어깃장을 내는 통에 살짝 짜증이 났다. 어제도 친구들에게 젤리에 대해 하소연을 했다. 하지만 여자와 싸우는 것은 지미에게 죽기보다 싫은 일이다. 그는 더 심난한 일을 만들기 전에 카페로 가기로 했다.
그는 입고 있던 반팔 그대로의 차림에 롱패딩을 걸쳤다. 흰 양말을 꺼내신고 하얀색 캔버스를 신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클럽에서의 차림과 다를 바 없었다. 패딩에서 어제의 술과 담배의 쩐내가 느껴져 그는 황급하게 집에 있는 페브리즈를 뿌렸다. 그때 핸드폰에서 짧은 진동이 느껴졌다. 지미는 미리 보기로 보이는 문자를 힐끗 봤다.
-오빠네 집 앞, 예전에 우리 같이 갔던 그 카페.
지미는 캔버스를 꺾어 신고 집을 나섰다. 겨울의 끝이라지만 아직 코 끝이 찡했다. 그는 따사로운 햇빛도 귀찮고 뭘 먹기도 귀찮은, 그냥 모든 것이 귀찮은 상태였지만 그래도 어떤 의무감으로 젤리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그리고 도착한 카페. 힙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컴컴한 분위기와 바리스타를 뒤로 한 셰파드 조명, 그 앞에 가득 늘어선 사람들로 인해 클럽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시끄럽고 들뜬 분위기다.
-지미!!
저기서 어떤 여자가 지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흰 바탕에 여러 색깔이 들어간 스트라이프 니트에 딱 붙는 짧은 스커트를 입고 긴 롱부츠를 신은 그녀가 지미를 보고 반갑게 웃고 있었다. 지미는 빨리 나오느라 대충 입고 온 자신과 달리 신경 쓴 젤리의 차림새를 보고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빠. 내가 자리 미리 맞춰 놓으니까 좋지?
-응. 근데 무슨 일이야
-다음 주 개강이잖아. 오늘 안 만나면 다음 주에 보기 힘들 것 같아서
-아, 그래? 뭐 시켰어?
-아니, 기다리고 있었지
그러고선 둘은 플랫화이트 두 잔을 시켰다. 젤리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지미의 어깨에 기대었다. 하필 젤리의 머리가 닿은 곳이 문신을 한 부위라 스멀스멀 통증이 올라왔다. 지미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그러다가 맞은편 탁자에서 갑자기 카메라 불빛이 켰다 꺼지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불빛은 두 차례 더,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카페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향하고 있었다.
지미는 젤리의 머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고개를 흔들면서 젤리가 '왜 그래~' 하며 투정을 부린다. 지미는 젤리가 잡은 팔짱도 빼고 맞은편에 앉은 사람에게 다가간다.
-지금 저희 사진 찍으셨죠?
# 다시 1인칭
작가의 하루를 보내기로 약속한 일요일. 오늘 나는 소재와 캐릭터를 수집할 노트 한 권을 산 뒤에 집에 오기 전 자주 가는 카페에 들렀다. 주말이라 역시 사람이 많다. 어차피 테이크 아웃 할 거라서 상관없긴 하지만 하루 종일 조용한 곳에서 자판 두들기다가 이렇게 사람들이 껴안고 수다 떨고 하는 모습을 보니 신선하다.
커피를 기다리면서 카페를 둘러본다. 어제 들었던 작가를 위한 작법 강의 중에서 '묘사하기' 숙제가 떠올랐다. 카페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묘사를 하는 것이 숙제였다. 속으로 '여기가 숙제하기 진짜 딱인데.'라고 생각하면서 노트북을 가지고 왔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숙제를 하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커피숍의 사진을 몇 장 담았다. 처음에는 파사드를, 잘 생긴 바리스타를 그다음은 커피숍에 앉아있는 몇 명의 사람들과 커플들의 모습을 촬영했다. 물론 글을 쓴 다음에 바로 지울 생각이었다.
구석에 놓인 큰 검은색 소파에 앉아있는 커플의 얼굴이 보였다. 둘 앞에 놓인 빈 커피 잔 안에는 하얀 크림이 남아 있었다. 포마드로 머리를 시원하게 넘긴 한 남자와 그 남자에게 머리를 기대고 있는 커플의 모습이었다. 여자는 자신이 입고 온 패딩으로 다리를 가리고 있었는데 짧은 스커트 차림인 듯해 보였다. 남자는 여자의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약간씩 찡그리면서 어디가 아픈 듯해 보였는데 그 마저도 내색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여자의 나른한 모습과 대비해 남자는 왠지 불편해 보였다.
대각선에 외국 여자와 대화하는 한국 여자의 모습도 보였다. 그 여자는 말을 할 때마다 손과 어깨를 사용해 자신이 하는 말을 더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급기야는 한 문장 문장을 뱉을 때마다 몸을 움직이면 안 될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눈동자와 고개까지 흔들고 있었다.
나는 저런 게 바디 랭귀지이지... 하면서 다시 고개를 돌려 아까 그 커플을 쳐다봤다. 이 카페에서 압도적으로 시선이 가는 쪽은 바로 저 인상을 쓰는 남자와 평온한 표정의 여자였다. 나는 다시 카메라를 들어 몰래 둘의 사진을 찍었다.
그때,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나는 얼른 핸드폰을 내리고 내 커피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주문번호 141번.
꺾어 신은 캔버스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지금 저희 사진 찍으셨죠?
나는 당황한 나머지 그 남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심기가 불편한 기색이었다.
-아니요.
-한번 보여주세요.
-왜 이러세요. 아니라니까.
그때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문번호 141번 손님
나는 벌떡 일어나 선글라스를 끼고 내 커피를 잽싸게 받아 밖으로 나왔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재빨리 집에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차가운 플랫 화이트를 반쯤 마시고 다시 노트북을 들었다. 흥미롭고 짜릿한 기분을 느끼면서 동시에 아주 아늑한 느낌을 만끽하며 다시 자판에 손가락을 올린다. 타닥타닥. 오전의 느낌과는 다르게 손가락을 더 신이 나 움직인다.
그렇게 나는 오늘 1인칭과 3인칭을 묘사하는 글을 썼다.
오늘의 작가 되기 숙제
- 1인칭과 3인칭으로 상황을 묘사하는 연습을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