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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롱 Jun 02. 2023

네덜란드 게스트가 남기고 간 눈코입

모든 게스트가 내 맘에 들 순 없다

새벽 3시쯤 되었을까? 누군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조심스레 집에 들어온다. 거의 비몽사몽 한 상태인 나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들어오다니... 지금이 몇 시인데."


마치 엄마가 된 것 마냥 속에서 잔소리가 터져 나온다. 하지만 게스트는 내 딸이 아니다. 그렇다고 일어나서 '왔니?' 라며 인사를 건네는 것도 싫다. 그래서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런데 옆 방으로 들어간 게스트가 갑자기 트렁크를 들고나간다. 무거운 크렁크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계단의 스테인리스 난간을 치면서 1층까지 '팅-팅-팅'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 지금 체크아웃하려는 건가?" 눈 감고 누워있었지만 내 신경은 온통 문 밖을 향하고 있었다. 계단 아래에서의 일이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잠결에 체크아웃에 대해 생각하며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 침대보를 정리하고 서둘러 이불 빨래를 해놓으면 되니까. 그러면 내가 사무실에 있는 사이에 이불이 모두 마를 것이며 다른 일로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불빨래를 서둘러 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한참 뒤, '띠띠띠띡. 또르륵.' 또다시 우리 집 문이 열렸다. 게스트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또 다른 짐을 가져다 내리고 재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와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확실히 체크아웃은 아니었다. 밤늦게 캐리어만 어디에 주고 온 것 같았다. 추측건대, 같이 있던 일행에게 주었으리라.



미운 딸내미 같은,

네덜란드에서 온 게스트


어젯밤 우리 집에 온 네덜란드 게스트는 밤 10시까지 숙소에 남아 있었다. 보통은 그 시각이면 관광을 마치고 집에 오는데 게스트는 저녁도 먹지 않고 무엇인가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러다 그녀는 밤 11시가 다 되어서, 내가 샤워하고 있는 틈을 타 집을 나섰다. 그리고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한밤 중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소리에 잠이 깬 나는 문득 어제 동료와 나눈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었다.

“네덜란드 사람이라고? 거기는 웬만한 게 다 합법이잖아. 무슨 짓을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죄책감이 덜할걸? “


동료는 예전에 자신이 여행을 갔을 때 봤던 것들을 늘어놓으며 거기는 마약이 합법이라는 얘길 해줬다. 그러면서 농담을 건넸다. '혹시 약을 권하면 안 한다고 해'라고.


새벽에 눈을 뜨니 번뜩 그 농담이 생각났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리 만무하지만 괜히 게스트가 있는 방 쪽으로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것을 아는지 아니면 모르는지, 게스트는 화장실만 잠깐 들렀다가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에 어느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게스트가 남긴 

컬러풀한 흔적


아침에 잠깐 게스트 방 앞에서 서성이며 인기척을 살피다 출근길로 향했다. 아무래도 체크아웃 시간 넘게 잠을 잘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다음 올 게스트는 없었지만 왠지 느낌이 싸한 것이 깨워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메시지를 남겼다.


"굿모닝, 어젯밤 얼굴을 못 봐서 아쉬워. 오늘 체크아웃은 11시야. 집에서 나갈 때 문자 줘."


하지만 게스트는 점심시간이 다 되도록 답이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메시지를 보낼까 싶었지만 괜히 독촉하는 것처럼 보일까 해서 그냥 관뒀다. 게스트는 1시가 다 되어서야 답장을 해왔다. 체크아웃을 했다는 것과 고맙다는 인사가 쓰여 있었다.


게스트가 돌아갔다는 것에 왠지 모를 해방감이 느껴졌다. 나는 최대한 빨리 집으로 돌아와 이불빨래를 하기 위해 침대를 들췄다.


아. 뿔. 싸


침구에 메이크업 자국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어제 화장실에서 미처 지우지 못한 화장을 침대 시트에서 지운 것 같았다. 이불 커버에 주홍빛이 도는 자국들이 선명했다. 또 덮는 이불은 빨간 립스틱 자국이 묻어있었다. 담배 절은 냄새와 헤어스프레이 향기가 온통 침구에 절여있었다.


나는 최대한 그 자국들을 지우려 손빨래를 했다. 다행히 선명하던 자국들이 희미해지면서 지워져 갔고 그 이후 세탁기로 몇 번 돌리니 예전 같은 깨끗함을 찾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짜증스러움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얀 침구 위에 그려진 눈코입



그래, 뭐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오늘의 피곤함의 절반은 게스트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새벽에 깨어 쉽게 잠들 수 없던 전날 밤, 어렵게 해낸 이불빨래, 담배 냄새 없애기 등으로 예상보다 많은 저녁 시간을 할애했다. 또 그녀가 남기고 간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까지 치면 기존 게스트들보다 더 많은 청소를 해야 했다.


하지만 모든 게스트들이 나와 꼭 맞을 순 없을 것이고 공유 숙박을 하면서 어느 정도 예상했던 리스크이기 때문에... 괜찮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뭐.


나는 게스트의 자리를 정리하며 이다음에는 또 다른 나와 같은 게스트가 와주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래야 1인 가구이지만 혼자 살지 않는 이야기를 계속 쓸 수 있을 것 같다. 또 내가 지치지 않고 게스트를 환영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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