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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롱 Aug 27. 2023

받고 싶은 만큼

11화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우리 팀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탕비실에서 수다를 떤다거나 메신저로 험담을 하는 횟수도 줄었다. 남달라의 쇼핑이 줄어든만큼 안조은의 불평도 줄었다. 나 역시 평소보다 일에 더 집중했다.


바뀐 사무실 분위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한 차장이었다. 괜히 조용한 사무실에 들어와 농담을 하며 너스레를 떤다거나 관련도 없는 업무로 주임들을 번거롭게 만들었다. 내가 야근을 할 때면 온갖 사회적인 문제를 떠들어대며 요즘 시대 워라밸을 안 지키며 사는 것이 얼마나 구닥다리 마인드인지 일장 연설을 했는데 어느 시점에는 그 모습이 조금 딱해 보이기까지 했다.


예전에는 나도 한 차장과 비슷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느낀다. 나는 다시 한번 신사가 준 카드에 손을 얹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영향을 줄 수 있다면, 내 태도가 한 차장에게 어떤 영향을 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그 영향이 달갑지 않은 듯 보였다. 대신 괜시리 나를 자극했다.




어느 날이었다. 담배를 한 대 태우고 온 한 차장이 커피 한 잔을 가지고 내게 다가왔다.


"김 과장은 내가 보면 좀 안타까운 구석이 있어.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티가 안나잖아."


그 말에 기분이 상했다. 마음 한편에서 갑자기 평가절하 되고 있다는 일종의 동의가 확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 반응을 알아챈 한 차장이 또다시 말을 이었다.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좀 티를 내면서 해. 김 과장 혼자만 그렇게 하면 얼마나 손해야."


그러면서 어디서 들었는지 모를 이 사람 저 사람의 사정에 대해 늘어놓다가 별 호응을 얻지 못하자 딱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원래 받은 만큼 일하는 거야."


회사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은 다 누리고 손해보지 않게 처신 잘하라는 말, 그는 오랜 회사생활을 통해 얻은 진리가 마치 그것이라는 듯이 받은 만큼만 일하라는 문장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회사생활에서 가장 억울한 부분이 무엇이더라? 바로 내가 일한 만큼 대우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다. 업무량은 많아서 날마다 야근인데 월급은 쥐꼬리라면? 무엇인가 성에 안 차다는 기분이 들 때마다 나를 비롯한 회사 직원들은 그걸 대체할만한 무엇인가를 찾아 나섰다.


예전에 한 주임은 탕비실에 놓인 커피 믹스를 한 주먹씩 챙기면서 이런 거라도 챙겨야 좀 덜 손해 보는 것 같다고 말했고 나 역시 월 말마다 돌아오는 사무용품 구매 신청서를 받아 들고 필요하지도 않은 것들을 잔뜩 시키면서 채워지지 않는 만족감을 대신하려 한 적이 있다.


"김 과장도, 받은 만큼만 일해."


한 차장은 마지막 정점을 찍었다. 아마도 그는 내 표정을 보며 자신이 한 건 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원하는 반응을 얻었다는 듯 급하게 자리로 돌아가 아무렇지 않게 모니터 한 켠에 켜 둔 주식창을 바라봤다.

 



"받은 만큼 일하면 딱 그만큼에서 넘어가지 못해요. 그게 그 사람의 한계가 되는 거예요."


한 차장과 전혀 반대의 얘기를 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손태양 대표였다. 언제부턴가 그를 만나는 새벽 5시가 기다려졌다. 그리고 손대표는 언제나 동일한 시간에 나타났다.


"한 차장님이 그렇게 말하는데 순간 욱 하는 감정이 올라온 거 있죠. 진짜 내가 하는 일이 티가 안 나서 지금까지 이 월급에 이렇게 많은 일을 하면서 다녔던 게 아닌가 싶고요."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상사가 더 방해를 놓는 것 같지 않아요? 다독이면서 같이 해보자는 말을 하긴커녕 왜 열심히 하느냐 식으로 말하고요."


"네. 프로젝트 관련해서도 짜깁기하라는 식으로 말하고... 오히려 쉬엄쉬엄 하라면서 의욕만 떨어뜨리고요."


손 대표는 무엇인가 짐작이 간다는 식으로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모든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나와 달리 모든 일을 별 일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생각하는 그의 태도가 의문스럽기도 했다.


"김 과장님이 열심히 일 할수록 한 차장님 마음은 불편한 거죠. 자신은 그렇게 열심히 하기 싫거든요. 모든 사람이 열심히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모두가 열정을 원하는 건 아니듯이요. 누군가는 열정을 부담스러워해요. 그만큼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은 거죠."


"그러고 보니 열정 카드를 받은 뒤부터 한 차장님이 자꾸 그러시네요." 이전 같으면 무엇을 하든 신경도 쓰지 않을 한 차장이었다.


"김 과장이 열심히 일 할수록 한 차장님도 자극을 받거든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에요. 한 차장님이 계속 그런 식인 이유는 본인 스스로가 일을 안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어서죠. 김 과장이 하면 할수록 한 차장은 자신이 안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셈이니까. 그래서 자꾸 김 과장에게 열심히 해봤자 소용없다고 말하는 거고요."


"일종에 찔림 같은 건가요?"


"맞아요. 그리고 받은 만큼 일하라는 말도 일종의 핑계죠."


"무슨 핑계요?"


"적당히 일해야 한다는 핑계요. 사실 성공한 사람들의 삶만 봐도 그 말이 사실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어요. 적당히 일해서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나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 편으로 적당히 일하는 게 뭐 나쁜 일인가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모두가 성공을 원하는 것도 아닌 데다가 모든 사람이 성공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일종의 반발심이 튀어나와 손대표의 말을 자르고 질문을 했다.


"그러면요? 받은 만큼 일하는 게 아니라면 받은 것보다 더 많이 일하라는 건가요? 그건 손해 아닌가요?"


그러자 마치 그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그가 말했다.


"손해 본다는 거 말이에요. 어떻게 측정할 수 있죠? 받은 만큼 일을 더 했는지를 누가 판단하느냐고요."


"그야, 뭐 야근을 날마다 하고..." 손대표의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하기가 어려웠다. 날마다 야근하지만 일한 성과가 없는 안조은이 받은 만큼 일을 더 했다고 할 수 있을까.


"김 과장님, 손해를 들먹이는 건 그냥 일을 안 하려는 핑계에 불과해요. 사실은요. 일한 만큼 받는 거예요."


"네?"


"일한 만큼 받는 거라고요. 김 과장님 연봉 올리고 싶죠?"


난데없는 질문이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올해도 동결이라면 정말 속상할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연봉협상에서 우위에 설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해 왔던 터였다. 올해는 꼭 연봉을 올리는 것, 그게 목표였다.


"아! 목표! 제 목표가 올해 연봉을 올리는 거예요."


"그러면 과거처럼 일해서는 안 돼요. 지금보다 더 해야 해요. 제 주변에도 그런 분이 계셨어요. 그분의 직급은 과장이었죠. 그런데 일하는 것을 보면 과장이 아닌 사장처럼 일했어요. 자신의 업무뿐만 아니라 회사가 돌아가는 전체 상황을 보고 여러 부서의 일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일에서 성과가 중요하게 여기기보다는 회사 전체의 성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던 분이셨죠."


그리고 그는 약간 목소리를 낮췄다. 마치 중요한 얘기를 알려주는 것처럼.

"그분이 결국 어떻게 되셨는지 아세요? 결국 사장이 되셨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놀랐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 왔던 논리와는 정 반대의 것이었으니까.


"김 과장님, 사람들이 흔하게 착각하는 게 있어요. 받은 만큼 일하자는 그 생각 때문이 오히려 자신에게 손해를 입혀요."


그는 오늘 할 얘기는 다 끝이 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는... 받고 싶은 연봉만큼 일을 하면 되는 걸까요?"


"만약 김 과장님이 차장으로 승진하고 싶다면 차장님의 마음으로 일해봐요. 그렇게 하면서 지켜보세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멀어지는 손대표의 뒷모습을 보며 내 목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봤다. 차장이라는 목표, 연봉 상승이라는 목표. 손대표의 말을 전부 믿을 순 없더라도 한 번은 베팅을 해보고 싶었다. 지금은 무엇을 해도 더 나빠질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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