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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롱 Aug 25. 2023

잘해보려는데 상사가 빌런

10화

그날 아침, 출근을 하면서 신사에게 받은 카드를 재킷 안 쪽에 조심히 넣었다. 일을 하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마치 부적이라도 되는냥 카드를 매만지며 '열정'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봤다. 그러고 보니 회사에서 한 번도 열정적으로 일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에 의해 등 떠밀려 어쩔 수 없을 때나 기한이 임박해 억지로 해냈던 일을 제외하고선.


손 대표가 인사를 건네며 한 말 중에는 '지금까지 귀찮고 피곤해서 하지 않았던 일을 해보라'라는 제안이 있었다. 가볍게는 엘리베이터 타는 것을 대신해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거나 미뤄둔 청소나 빨래를 당장 집에 가서 하는 것,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의 일을 도와주는 것 등이 포함되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귀찮게 여겼던 일이 눈앞에 들어왔다. 어제 마시고 둔 플라스틱 커피 잔들이 귀퉁이에 모여 있었고 언제 무슨 이유로 사용했는지 모를 물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퇴근 전에 귀찮아서 정리하지 않은 물건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았는데 그게 평소 나의 정신상태를 반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장 책상 정리부터 시작해 사무실 이곳 저곳을 정리했다. 얼마 전에 행사용으로 받은 낱장짜리 물티슈부터 손톱깎기, 영수증, 다 쓴 볼펜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그것들을 정리하고 비워냈다.


멀리서 남달라가 나에게 메신저를 확인하라는 손짓을 했다. '오. 그러고 보니 오늘 오전 미팅이 있었는데.'  깜빡하고 있었던 미팅을 위해 부랴부랴 노트북을 들고 회의실로 향했다.




무엇인가 중요한 일이 있었는지 기획팀, 제작팀의 대리급 이상부터 모두 모이라는 지시가 있었다. 조금 늦게 도착한 바람에 회의가 시작된 중간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걸 본 부서장이 뒤늦게 온 나에게 시선을 보내고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번 건은 진짜 중요해. 다들 준비를 철저히 하자고. 일단 최고제약 알지? 이번에 새 에너지 드링크를 출시한다네. 거기 광고를 우리가 맡게 되었으니까. 한 차장이 좀 책임지고 김 과장이랑 같이 해주면 좋겠어."


"네. 걱정 마십시오." 부서장 맞은편에 앉은 한 차장이 자신 있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럼 다들 자료 잘 살펴보고. 다음 주에 준비한 것들을 가지고 다시 한번 이야기 하자고."


"네." 모두가 그 말에 끄덕였다.


평소의 나라면 신규 광고 기획 건에 대해 부담스러워했을 텐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어쨌든 열정을 가지고 해 보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신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순식간에 머릿속에는 잘할 수 있을지, 또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 막막함이 올라왔고 지금 진행하고 있는 업무양이 떠올라 부담스러웠다.


미팅이 끝나고 저기서 한 차장이 "김 과장 나 좀 봐." 라며 불렀다. 모두가 자리로 돌아가고 미팅룸에 둘만이 남았다. 한 차장은 사람들의 말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운을 뗐다.


"김 과장, 지금 맡고 있는 일 많지?"


광고 얘기일일 것으로 예상했는데 뜻밖의 질문이라서 놀랐다.


"뭐. 다들 똑같죠."


의아했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투로 대답했다.


"그래. 부서장님은 무슨 생각으로 이 바쁜 와중에 저걸 또 잡겠다고 하신 거야. 하여튼 간, 그. 김 과장도 쉬엄쉬엄 해. 지난번 그 백화점 건도 진행 중이지?"


"네. 이제 최종 마무리만 남았어요."


"지난번 했던 것들 중에서 잘 나왔던 거 한번 찾아보고 비슷하게 가자고. 너무 욕심내지 말고."


그러면서 한 차장은 주머니 속을 뒤지며 담뱃갑을 찾았다. 회의 때 보여준 행동과는 달리 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상체를 뒤로 젖혀 피곤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런 그를 보며 별다른 대꾸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머쓱하게 웃었다. 무엇인가 잘해보려고 하는 나와는 반대로 한 차장은 이번 계약건을 대충 넘기고 싶어 했다.


"아니 부서장님은 지난번에 약속하셨던 워케이션 건에 대해서는 물어보신 거야? 뭐야. 요즘 재택근무 하는 회사도 많아지는데 우리 회사는 맨날 크리에이티브 얘기하면서 일하는 건 옛날방식이니 원. 오늘 같이 날씨도 좋은 날 외국 나가서나 하다못해 제주도 가서 재택근무하면 좋잖아. 아이디어도 막 나오고"


"아. 그러면 너무 좋죠." 뒤질세라 워케이션의 장점에 대해 몇 가지를 말하긴 했지만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서 한 것일 뿐이었다. 나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고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선 조심스레 노트북을 덮었다.


마지막으로 한 차장이 말했다. "파트너사랑 하면 좋은 게 뭔 줄 알아? 우리가 너무 성의 없지만 않으면 고만고만 넘어가 주는 거야. 그리고 그전에 담당자한테 밥 한번 먹자고 하고. 그러면 되지, 하루이틀이야?“


그 말에 눈치껏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실무를 하는 담당자로서 일은 해야 했으니 마감기한에 대해 질문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한차장이 귀찮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고선 담배를 태우러 나갔다.


-열정적으로 살려고 하자마자 일이 쏟아지네


회의를 마치고 자리에 앉아 일에 집중 하다 보니 어느덧 오후 10시가 넘었다. 모니타에서 눈을

떼자 눈이 침침하고 머리도 아팠다. 평소 같으면 한차장이 하자는 대로 지난번에 성과가 좋아던 것을 찾아 대충 짜깁기를 했을 터인데 이번만큼은 다르게 해보고 싶었다. 나는 술에 대한 생각도 접은 채 최고제약의 건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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