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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롱 Sep 03. 2023

상사의 갑작스러운 퇴사

12화

프로젝트를 맡은 후 며칠이 지났다. 나는 전과는 달리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많은 메일과 전화를 받았고 짧고 긴 회의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있었다.


일에 몰두하고 있는 나와 다르게 한 차장은 매우 여유로워 보였다. 직원들과 회식을 하고 업무보다는 주식을 더 많이 봤다. 광고 제작까지의 마감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한 차장의 행동이 바뀌지 않자 의아했다.


우리 사무실과 한 차장네 사무실 사이의 판이하게 다른 모습 때문에 직원들 사이에서는 내가 유난히 오버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 오갔다. 또한 한 차장이 여유로운 것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렸다.


평소 같으면 뜬소문들에 귀를 기울였을 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워낙 일이 많고 당장 처리해야 할 건들이 있었기 때문에 소문에 신경을 쓸 시간이 없었다.


일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바뀌고 나서 내가 있는 공간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보이지 않는 어떤 기류가 알게 모르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서인지 예전 같으면 담을 쌓고 필요한 말 이외에 하지 않던 안조은의 태도는 놀랄 정도로 바뀌었다. 하기도 전에 불평부터 하는 습관이 줄었다.


또 무슨 일이 생기면 탕비실에서 몰래 사람들 뒷담화를 하던 남달라도 일에 집중했다.쇼핑 횟수도 줄어 옆에 쌓이곤 했던 쇼핑백의 수가 이제는 거의 없을 정도다.


그렇게 별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던 어느 날, 부서장의 호출을 받았다. 단독으로 호출을 받은 일은 입사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영문을 몰라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걱정되고 초조한 마음을 갖고 부서장 실로 향했다.


"김 과장, 전보다 훨씬 잘하고 있던데.“


부서장이 꺼낸 첫 말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기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살짝 고개를 숙여 미소를 감췄다. 그러자 부서장이 물었다.


"그래, 요즘 일이 어떻나?"


"지난번 백화점 건은 마무리가 잘 되었고 지금은 최고제약 건도 제작 마무리 단계입니다.“


별 문제없다고 말하는 나와 달리 부서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면서 최고제약 측에서 기대에 못 미친다는 반응을 보내왔다고,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되고 있는 것인지 다시금 확인하는 것처럼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내가 바로 답하지 못하자 부서장은 말없이 책상 위에 있는 패드를 열어 두 가지 콘셉트의 영상을 보여줬다. 하나는 몇 년 전에 히트를 쳤던 광고였고 디른 하나는 최고제약의 시안처럼 보였다.

"너무 비슷히지 않나."


나는 두 개의 영상응 보면서 흠칫했다. 프로젝트 초반 '대충 짜깁기 하자' 라는 식으로 했던 말과 내가 내민 새로운 광고 시안을 떨떠름하게 살피던 누군가의 표정이 떠올랐다.

부서장은 내 표정에서 언뜻 비친 불안을 눈치챘는지 기획 원본을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별 얘기 없이 나가보라고 말했다.


'일 한번 잘해보고 싶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터덜터덜 회의실로 돌아오면서 대체 한 차장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것인지 곱씹어봤다. 아무리 자신이 최고제약과 오랜 관계이고 친하다 해도 이렇게까지 대충 하고 있을 줄이야. 게다가 며칠 동안 밤낮없이 직원들과 머리를 싸매고 만든 기획의 많은 부분들이 거의 반영이 안되어 있었다. 부글거리는 마음을 붙잡고 화를 식혀보려고 했지만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책상에 돌아와 머리를 쥐어 싸맸다. 예전과 다르게 제대로 해보려고 했는데 상사 때문에 다 망친 것 같았다. 한 차장에게 이 모든 일의 자초지종을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아까 미팅을 나간다고 했던 한 차장은 퇴근 시간이 다 지나고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오전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자 남달라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과장님, 혹시 알고 계셨어요?"


"무슨?"


"지금 다들 난리예요. 한 차장님 갑자기 사라졌어요.“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한참 동안 남달라의 얼굴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장난인가 싶었는데 다른 주임들이 같이 동조하며 심각한 표정을 짓자 그 말이 곧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제 갑자기 안대리한테 내일부터 안 나올 거라고 했다는 거예요.”


"갑자기 왜?"


"저도 모르죠."


그 말에 번뜩 어제 부서장과의 면담이 생각났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갑자기 그만둔다는 것이 이상했다. 인사도, 인수인계도 없이?


"지금 한 차장님이랑 연락돼?“


"아뇨.“


남달라는 아침부터 한 차장에게 전화, 문자, 메일 다 보내봤지만 묵묵부답이라고 답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는 물론, 한 차장이 관리해 온 대행사와 클라이언트들의 메일에도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초조해하고 있었다.


"과장님, 부서장실 호출이에요."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처럼 한 차장의 잠수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수근덕 거리고 있었다. 한 차장 아래에서 일하던 PD의 표정은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를 둘러싸고 몇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계속 질문을 퍼붓고 있었는데 부서장이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회의는 PD 청문회로 바뀌었을지 모른다. 잠시 후, 부서장이 도착하자 모두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을 아꼈다. 소란스럽던 사무실의 분위기도 이내 엄숙해졌다.


"다들 알다시피 제작팀이 해 오던 업무를 다시 검토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부서장은 그 말을 하며 나와 PD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할 말이 많은 눈빛이었지만 그중 절반도 말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긴 회의 끝에 부서장이 내린 지시는 최고제약 건의 광고를 다시 제작하는 것과 한 차장이 맡았던 프로젝트도 모두 전면 검토하는 것이었다.


나는 회의 내내 입술을 굳게 다물고 갑자기 일어난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찾아보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저 아래에서부터 몰려오는 배신감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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