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이야기 2화
엄마에 대한 첫 이야기를 쓰고 나서 엄마에 대해서 매일 더 많이 생각하다 보니 우리 엄마가 참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장성해서 시집도 간 딸네미 병수발을 한 것에서도 이미 끝장나게 위대한 사람이지만, 엄마와 지나 온 내 삶에서 엄마가 영향을 미친 것들을 생각할 수록 엄마에게 감사함은 물론 존경심이 차오른다.
우리 엄마는 55년생, 목포에서 태어났다. 엄마는 2남 5녀의 7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자기 위로는 오빠, 남동생에 끼어서 자란 우리 엄마의 어린 시절은 참 힘들었다. 외할머니의 남존여비 사상을 기반으로 한 자식 차별이 매우 심했기 때문이다.
아들들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순둥이 우리 엄마는 오빠와 남동생의 도시락은 챙겨도 자기 도시락을 챙기지 못해 물로 배를 채운 적도 있다고 했다. 엄마가 50 즈음해서 외할머니가 엄마 생일을 처음으로 축하해준 적이 있었다. 그때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20만원이 넘는 부츠를 하나 사주셨는데, 그걸 가슴에 안고 와서 먹먹하게 서있던 엄마가 눈에 생생하다.
그날 엄마는 처음으로 자기가 가졌던 자기 부모, 특히 엄마에 대한 첫 원망을 이야기 해줬다. 그 원망은 나를 낳고 나서 생겼다고 한다. 엄마가 나를 낳고 자는 나를 보다가 너무 화가 났었다며, '내 배로 낳은 내 새끼면 이렇게 이쁜데, 대체 왜 나한테 그랬을까'하는 원망과 함께 자신은 내 새끼한테 넘치도록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안아주고 뽀뽀해주며 사랑해줄거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우리 엄마는 실제로 자신의 다짐대로 그렇게 자식을 대했으며, 그것에 아빠도 적극 동참 시켰다. 엄마가 자신의 부모에게 느꼈던 애정표현에 대한 결핍을 우리가 겪지 않도록 노력했고, 덕분에 우리 자매는 사랑을 아는 사람으로, 사랑에 결핍이 없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다.
엄마는 공부를 잘해서도 혼났었다고 한다. 기집애가 공부를 잘하는 것은 쓸모가 없다는 아주 옛날 옛적 핵꼰대 마인드를 가졌던 우리 외할머니는 엄마가 공부를 하려고 하는 것도 싫어했다고 했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손전등을 키고 몰래 책을 읽었으며, 결국은 들켜서 이불에 감긴 채로 맞은 적도 있었고, 고등학교 선생님이 어떻게든 엄마를 대학에 보내려고 하셨지만 외할머니의 반대로 인해 성적이 되어도 대학을 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엄마는 '공부를 자유롭게 하는 것'에 대한 결핍이 생겼다.
엄마는 나에게 공부를 하라고 강요한 적은 없지만, 여자니까 공부할 필요는 없다고 한 적이 없었다. 그저 공부에 대해서도 나에게 스스로의 선택권을 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성적이 좋았던 내가 2학년 때부터 애니메이션에 빠져서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겠다, 예술을 하겠다 하면서 공부를 놓았을 때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는 나에게 내가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했고, 하려는 것에 대한 공부를 해야만 한다고 했을 뿐이다.
나중에 성인이 되고 나서 엄마가 '사실 나 너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랑 면담했을 때 연대 의대는 그냥 들어간다고 해서 설레었는데, 좀 아쉽긴 했다?'라고 했을 때, 우리 엄마 속이 문드러졌었겠구나 싶었다. 엄마에게 '그때 두들겨 패서라도 공부 시켰으면 내가 외과의사라도 되었을거 아냐~'라고 했더니 나는 너라는 친구를 잃었을지도 모른다면서 '네가 하고 싶은 공부를 네 맘대로 했으면 했어. 내가 그렇게 못했으니까.'라며 엄마는 그저 웃었다.
우리 엄마는 '공부를 자유롭게 하는 것'에 대한 결핍을 나에게 느끼지 않게 해주기 위해, 내가 공부하는 것에 대한 선택을 하게 해줬다고 생각한다. 그 덕분에 나는 내가 해야 할 공부가 무엇인지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는 것과 공부를 하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여자라서 해볼 수 없는 수 많은 도전에 우리 엄마는 늘 목 말라 있었다. 우리 자매가 둘 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 엄마는 우리에게 자신이 대학교를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는 엄마의 멋진 도전에 응원을 보냈다. 엄마가 하고 싶던 공부 마음껏 해보라고 했다. 50대 나이에 방송통신대를 들어간 엄마는 정말 열정적으로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하더니 장학금도 받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다.
그 이후로 공부에 더 재미가 들렸는지 60대에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더니, 이제 70대에는 주식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작년에 고희연을 치룬, 70대 할머니가 된 우리 엄마가 주식이라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우리가 드린 용돈과 연명치료사 일을 하면서 번 돈을 모아서 시드 머니 400만원 만들었다고 했다.
막내 이모와 함께 매일 차트를 보면서 토론도 하고, 주식 차트 공부하기 위해 자기 사위에게 자신이 주식으로 번 돈으로 사겠다며 태블릿도 구해달라고 했다.
괜히 돈이라도 잃게 되면 실망하게 될까 염려가 되어서 '엄마, 돈 잃더라도 재미있게 세상 공부했다고 생각해'라고 했더니, 자기는 그렇게 잃을 정도의 도박은 안한다면서 주식을 하는 이유가 치매 예방이라고 했다. 숫자와 친하게 지내면 치매가 안 온다고 어디서 들었다면서, 그런데 자긴 숫자는 싫고, 고민을 하다가 돈이면 관심이 생길 것 같아서 했다는 귀여운 우리 엄마다.
지금은 주식 공부를 하면서 세상을 알게 된다는 것도 좋다고 재밌다고 했다. 그리고 그 세상 속에서 돈을 보는 공부도 제대로 하고 있는지 400만원으로 시작한 엄마의 주식 계좌는 2개월 만에 600만원을 돌파했다.
요즘에는 이건 반드시 오른다면서 이야기를 술술술 풀어내기까지 하는데, 반짝거리며 이야기하는 엄마가 너무 귀엽다. 우리도 엄마에게 돈을 맡긴다니까 소스라치면서 절대 싫다고 하는 것도 귀엽다.
엄마에게는 나중에 '주식은 칠십부터! 71세에 400만원으로 시작해서 10년 만에 40억 만든 이야기'라는 전설의 책을 써보자고 했다. 그렇게만 되면 너무 좋겠다며, 그럼 그 책을 쓰기 위해서 성과를 내보겠다며 이 책의 인세는 우리 자매가 가져가라고 한다.
새로 도전하는 엄마의 삶에서 나는 여전히 새로운 배움을 얻고 있다. 도전하는 것에는 나이가 없다는 것을 삶에서 보여주는 엄마 덕분에 말이다.
실은...소녀 같고 유쾌한 우리 엄마의 어린 시절은 최근까지도 엄마를 힘들게 했다. 엄마는 이로 인해 정신과 상담을 받았고 축적된 우울감에 약도 상당 기간 먹었어야 했다. 나는 이 과정에서 나는 엄마가 정말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또 한번 깨달았다.
엄마는 자신의 결핍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자신의 삶 통해서 결핍을 극복해내는 것을 보여주며, 내가 스스로 결핍을 인지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게 곁에서 함께 해줬다. 그런 엄마가 있었기에, 나는 결핍을 동기부여로 치환하여 내 삶이 결핍에 억눌리지 않게 살아올 수 있었다.
내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 암을 이겨낼 수 있었던, 내가 가진 삶의 강함은 모두 엄마의 강함을 배운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엄마가 나에게 미리 남긴 무엇보다 큰 유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