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파이더맨은 MCU에서 최고의 인기를 지닌 캐릭터 중 하나다. 본래부터 마블을 대표하는 히어로이기도 했고, 톰 홀랜드만의 매력이 가득 담긴 10대 피터 파커의 풋풋함 넘치는 밝은 소년미는 거부하기 힘든 매력이기 때문이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어벤져스: 엔드게임> 등 MCU의 팀업 영화들에서 다른 히어로들과 차별화된 개성을 보여주기도 했고. 하지만 과연 MCU의 스파이더맨 '영화'가 캐릭터만큼이나 매력적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결코 그렇지는 않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전작인 <스파이더맨: 홈커밍>은 차별화된 스파이더맨, 토니-피터의 유사 부자관계, 벌처라는 또 하나의 인상적인 빌런과 MCU의 뒷이야기를 살펴보는 재미도 있었지만 단독 작품으로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 액션 퀄리티, 설정 오류와 기대에 미치지 못한 스토리 전개로 비판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MCU의 스파이더맨 영화는 전체적인 세계관 내의 한 요로 보느냐 혹은 독립적인 히어로의 내러티브로 보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시리즈라고 볼 수 있는데,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역시 마찬가지다.
2. MCU의 인피니티 사가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이라는 대서사시와 함께 끝이 났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이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엔드게임>이 남긴 수많은 질문들, 예를 들어 MCU에서 퇴장한 히어로들의 뒤는 누가 이을지, 핑거 스냅 이후의 지구는 어떻게 변할지 등에 대해 수많은 미디어와 팬들이 온갖 추축을 내놓곤 했다.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은 <엔드게임> 이후의 MCU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충족하면서 동시에 걱정과 우려를 효과적으로 잠재우고 있다.
아이언맨의 후계자라는 타이틀과 토니 스타크의 (여러 가지) 유산을 다루는 <파 프롬 홈>이기에 MCU에서 줄곧 강조되던 토니와 피터의 유사 부자 관계는 본작에서도 주요한 플롯 중 하나다. <홈커밍>에서 스파이더맨 슈트가 히어로가 갖추어야 할 큰 힘과 큰 책임을 시각적으로 구현했던 것처럼, <파 프롬 홈> 역시 인공지능 '이디스'를 비롯한 여러 장치를 활용해 토니와도, 어벤져스와도 다른 독립적인 한 명의 히어로로서의 성장과 각성을 MCU만의 차별화된 버전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미스테리오의 환각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마저 잃고 헤매던 피터가 마음을 다잡고 슈트를 만드는 씬에서 <아이언맨>의 OST였던 'Back in Black'이 삽입된 것처럼.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에서 등장한 핑거 스냅의 여파와 그로 인한 MCU 속 지구의 변화에 대해서도 유머와 오마주가 섞인 깔끔한 설명과 정리를 제공한다. <홈커밍>에서 일반 시민들에게 어벤져스가 어떤 양면적인 의미인지를 '벌쳐'를 통해 보여주었듯이, <파 프롬 홈> 역시 우주적인 이벤트가 사람들의 일상의 삶과 심리, 사고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 빌런인 '미스테리오'를 통해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또한 <캡틴 마블>에서 등장했던 떡밥들을 쿠키 영상을 통해 회수하면서 페이즈 4에 대한 기대감을 끌어올리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인종, 젠더, 난민 문제 등 사회적인 이슈에 조금씩 목소리를 내오던 MCU의 연속선상에서 미디어와 가짜 뉴스에 대한 의제도 스토리 내에 적절히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처럼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은 왜 이 작품이 <엔드게임> 직후에 개봉했는지, 그리고 MCU가 얼마나 치밀하고 꼼꼼히 유니버스를 설계하고 확장해 나가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3. 하지만 MCU 내에서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이 지니는 위치와 위상과는 별개로, 본작이 스파이더맨 단독 작품으로서의 매력을 온전히 발현하지는 못했다는 인상이 강한 것도 사실이다. 우선 캐릭터의 성장을 위한 의도인지는 몰라도, 스파이더맨의 능력이 최대로 나올 수 없는 환경에서 액션씬이 많다 보니 액션 분량과 퀄리티와는 별개로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물론 스파이더맨의 능력치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 자체는 전편에 비해 발전했고, 그전 실사영화들에서 제대로 영상화된 적 없는 스파이더 센스가 멋지게 등장한 점은 <파 프롬 홈>만의 독창성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라이트 액션보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등장하는 뉴욕 활공 시퀀스가 더 인상적이라면 이는 분명한 문제로 보이기 때문이다.
허술한 전개와 과도한 유머 씬도 아쉽다. 진행되는 상황의 무게감이나 중요도와 관계없이 유머가 넘쳐흐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로 인해서 극의 완성도가 저하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피터와 MJ의 로맨스, 히어로로서의 고뇌, 각성, 성장, MCU의 큰 그림 등 수많은 서브플롯을 한데 합치기 위한 필요악이며 <파 프롬 홈> 뿐만 아니라 다른 MCU 작품들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최선의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왓츠 감독이 하이틴 드라마로서의 스토리를 섬세한 연출로 잘 살려내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전작에서 스파이더맨 활동을 기다리며 흥분을 참지 못하는 피터의 모습처럼, 이번에도 10대의 사랑에서 느껴지는 순수함, 떨림, 풋풋함 등의 감정이 결코 많지 않은 분량에도 적절하게 잘 묘사되기 때문이다. MCU가 의도한 고등학생 히어로라는 정체성이 완벽히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고.
<파 프롬 홈>에서 이러한 섬세한 연출의 가장 큰 수혜자는 당연히 MJ일 것이다(<홈커밍>에서는 물론 피터 파커일 것이고). 자칫하면 정치적 올바름과 마블 코믹스 원작과 같은 영화 외적인 이슈로 논란이 될 수도 있었던 캐릭터이지만, 기존 히로인들과는 다른 능동적인 면모와 너드와 같은 부분을 10대의 풋사랑 안에서 적절히 포함시키며 기존과는 다른 개성적인 히로인을 등장시킨 셈이다. (앞으로 시리즈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MCU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히로인이 될 만한 자격이 충분하지 않을까.
5. 결국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은 과거 <아이언맨 2>가 그러했듯 MCU의 전개를 위해서 일정 부분의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던 영화 중 하나다. 단독 영화로서의 매력이나 완성도 자체는 다소 부족할지 모르나, MCU라는 거대한 세계관의 중요한 조각으로서 그 소임을 완벽히 다하는... 앞으로도 MCU 영화들을 대할 때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는 부분인 듯싶다. 앞으로 MCU의 스파이더맨은 한 편이 남아 있는데(더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지만), 3편에서는 MCU라는 히어로 영화와 하이틴 드라마라 사이에서 거미줄 타기를 끝내고 MCU와 스파이더맨의 완벽한 조화와 성장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