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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oDAY Jul 27. 2019

광장:사람들에게 열려야 공론장이 된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러시아 여행 후기

1.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많은 광장들을 접하게 된다. 대도시는 물론 지방의 작은 도시들에도 광장은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사실 광장은 어떻게 보면 매우 단순한 장소다. 광장은 넓은 공간이고, 비어있는 공간이며, 그렇기에 사람들이 모여서 채울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여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광장은 단순한 장소와 공간보다 더 크고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러시아 하바롭스크의 레닌 광장. 화려한 분수대의 야경이 인상적이다.


2. 광장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사람들 간의 교류가 생기기 마련이다. 간단하게 인사나 안부를 나누기도 하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어떤 주제에 관해 서로 의견을 교환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사람들은 광장에서 만나 서로 협력해 하나로 힘을 모으기도 하고, 그들 사이에서 입장 차이로 인한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이 과정은 곧 사람들 간의 토론이 진행되는 것을 의미하고, 이렇게 광장은 미시적인 관점에서, 생활 안에 민주주의가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공론장이 되곤 한다. 그리스의 아고라가, 로마의 포룸이 그러했듯이. 


이렇듯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자유롭게 소통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광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광장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환경도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광장에 모이지 못한다면 그 광장은 장소로서 존재하지만 죽어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또한 광장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모든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말을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광장이 공론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테니. 사실 서유럽을 여행하며 많은 광장들을 접할 때만 해도 이러한 부분을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이번 러시아 여행은 달랐다. 


러시아 이르쿠츠크의 키로프 광장. 2차 세계 대전의 전사자들을 기리는 '영원의 불꽃'이 위치해 있다.


3. 러시아의 도시들을 가보면, 서유럽처럼 광장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바롭스크에도, 이르쿠츠크에도, 모스크바는 물론이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각자의 광장이 존재한다. 하바롭스크는 화려한 분수대가 있는  '레닌 광장'이 있고, 이르쿠츠크에는 영원의 불꽃이 타오르는 '키로프 광장'이 위치하고 있다. 또 모스크바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붉은 광장'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역사의 현장인 '궁전 광장'이 자리 잡고 있다. 각 도시의 중심이자 랜드마크인 곳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느낀 러시아 광장의 특징은 열려 있음에도, 닫혀 있는 것처럼 답답하다는 점이었다. 러시아의 광장을 가면 처음에는 놀라며 흥분한다. 러시아 광장과 그 주변에는 관공서, 은행, 동상, 유적지 등으로 가득하며 구경하는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곧 '대체 이 광장은 용도가 뭐지?'와 같은 의문이 든다. 광장 그 자체로 충분히 멋지고 웅장하며 지금의 러시아와 과거의 소련을 연결하는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장소라는 것도 알 수 있지만, 정작 (관광객들을 제외한) 사람들이 광장 주변에서 할 만한 것들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은 아닐까. 광장임에도 불구하고 조용한 느낌을 받기도 하고. 


러시아 모스크바의 상징 붉은 광장. 성 바실리 성당, 굼 백화점, 부활의 문, 크렘린, 레닌의 묘 등 수많은 랜드마크가 집결해 있다.


4. 과거 찾아갔던 서유럽의 광장들, 런던의 트라팔가르 광장, 파리의 스트라빈스키 광장, 마드리드의 솔 광장, 암스테르담의 담 광장들과 비교해보면 러시아 광장들의 특징은 더욱 도드라진다. 이 광장들은 결코 러시아의 그것만큼 규모가 크지는 않다. 광장이라는 말에 안 어울리게 작다 라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광장들은 관광객뿐만 아니라 현지인들로 가득한 공간이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끌벅적하다. 왜 그럴까?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답은 하나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는 환경. 서유럽의 광장 주변에는 음식점들, 카페들, 상점들이 자연스럽게 둘러싸고 있고, 그렇기에 사람들이 오고 가면서 자연스럽게 휴식도 취하고,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는 공간으로 형성된다. 생활 안에서의 공론장이 만들어지는 셈이다(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은 조금 경우가 다를 수도 있지만, 실상 관광객들만 가득한 공간이기 때문에 '공론장'으로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전 광장. 예르미타주 박물관과 겨울 궁전이 주위를 감싸고 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한 장소이기도 하다. 


5. 사실 러시아의 광장을 보면서 다른 의미로 놀란 부분도 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그래서 지나친 일반화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러시아 사람들이 정치적인 의견을 내는 광경을, 자그마한 시위도(1인 시위나 피켓도) 보지 못했다. 한국의 광화문 광장을 생각해보자. 그곳은 촛불 혁명이 일어난 곳이지만, 동시에 개개인들이 자신들의 작은 의견들도 자유롭게 표출하는 공간이다. 세월호 천막부터 우리공화당의 천막, 사람들의 1인 시위까지 쉴 틈 없이 공존하는 시끄러운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이런 광경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수도에서도, 문화의 중심지에서도 시베리아와 극동 지방의 중심 도시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는 광장. 그래서 러시아의 광장을 죽어있고, 열렸지만 닫힌 공간이라고 느끼지 않았을까. 


맨 위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런던의 트라팔가르, 파리의 스트라빈스키, 마드리드의 솔, 암스테르담의 담 광장. 주변에 카페, 상점들이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6. 생각이 여기까지 펼쳐지고 나니, 한국의 광장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우리에겐 광장이라고 할 만한 공간 자체가 부족하긴 하다. 광화문 광장을 제외하면 딱히 떠오르는 장소가 없기도 하고. 또 광화문 광장이 정치적인 측면에서 많이 활용되는 장소이기는 하나 우리의 삶과 긴밀히 붙어 있는 곳은 아니기도 하다. 주변에 관광명소나 랜드마크는 많지만 광장 자체는 넓고 휑하며 주변에 관공서들로 가득하고. 


또 광화문 광장이 공론장으로 많이 활용되기는 하나, 과연 그곳이 참된 공론장일까 생각해보면 결코 그렇다고 말하기 힘든 것도 맞다. 어떻게 보면 그 공간은 입을 통해 말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할 뿐, 귀를 통해 듣는 사람은 없다시피 한 장소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다른 이들의 의견을 무시하며 막무가내로 천막을 설치하기도 하고. 이렇듯 우리네 광장을 보면 아직 한국의 민주주의가 미시적인 측면에서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구나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서울대학교의 아크로폴리스나 이화여자대학교의 ECC 같은 공간에서 학생들의 민주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학생총회가 열리고 학생 간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아마 우리에게 광장은 아직 일상생활이나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민주주의가 정착 중인 단계라고 말하는 것을 단적으로 시각화시켜주는 장소이지 않을까. 러시아에서 서유럽을 거쳐 한국까지, 광장을 쫓아가 본 여행의 일면이었다.


좌측부터 광화문 광장, 서울대학교 아크로폴리스, 이화여자대학교 ECC.


여행은 새로움을 만나는 경험이지만, 익숙함을 되돌아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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