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noDAY Dec 24. 2018

로마

빼기의 미학. 뺄수록 마음에 꽂히는 너와 나와 우리의 이야기.


(약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칠드런 오브 맨>,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그리고 <그래비티>를 만든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넷플릭스의 손을 잡고 만든 첫 영화, <로마>가 공개되었다.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로마>는 1971년 멕시코시티의 로마 지역을 배경으로 감독 본인의 자전적 스토리를 영상화한 작품이다. 또한 <로마>는 <그래비티> 이후 5년 만에 쿠아론 감독이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감독이 상당히 긴 시간을 두고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진 영화라는 셈인데, 개인적으로 <로마>는 그의 역량이 가장 완벽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즉 쿠아론 감독의 기술적, 스토리적 역량이 가장 빛나는 작품인 것이다. 우선 <로마>의 기술적 측면부터 살펴보자.  



2.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롱 테이크'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감독이다. 그는 <칠드런 오브 맨>과 <그래비티>는 모두 화려하고, 감각적이면서 스토리 진행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시퀀스를 롱 테이크로 담아내서 모두를 놀라게 한 바 있다. <로마>에서도 그의 카메라는 끊어지지 않는다. 작중 대표적인 장면이 세 장면이 있다. 주인공인 '클레오'가 밤에 마지막으로 집을 정리하는 장면, 극장에서 클레오가 임신을 했다고 남자친구에게 고백하는 장면, 클레오가 병원에서 끝내 유산하는 장면이 그것들이다. 이 장면들은 이 작품의 전체적인 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롱 테이크 기법은 보통 캐릭터들의 감정선이 끊기지 않도록 만들고 그 감정선을 관객들이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위의 세 장면은 클레오의 '고단한 일상'과 인생 최대의 '행복과 변화', 그리고 '아픔'이라는 중요한 3가지 감정선을 묘사되는 시퀀스인데 감독은 차분하고 담담한 카메라 워킹으로 이를 끈기 있게 스크린에 담아낸다. 덕분에 관객들은 '클레오'에게 온전히 감정이입하게 되며 그녀의 스토리를 자신들의 이야기로 여길 수 있다.  비단 롱 테이크 시퀀스 만이 아니라 작중 모든 쇼트들이 다 길다. 사실 그래서 영화의 호흡이 평범한 영화들에 비해 매우 느린데, 이 역시 관객들이 인물들의 스토리에 적극적으로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시도인 듯하다.  



또한 상술한 장면들은 디테일적인 측면에서도 아주 훌륭한 시퀀스다. 첫 번째 장면은 360도로 회전하는 카메라를 통해 클레오의 일상과 집안의 모습을 자세히 보여준다. 이는 클레오의 고단함을 잘 보여줌과 동시에 작품의 후반부에 변화된 집의 모습과 대비되며 가정의 변화 및 불화를 암시한다. 두 번째 씬은 예상치 않은 임신을 두고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는 남녀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두 남녀의 애매한 입장 차와 관계의 변화를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세 번째 씬에서는 유산한 '클레오'와 대비되는 아주 사무적인 태도로 일에 임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의 모습을 통해 그녀의 충격과 아픔을 극대화한다.


또 다른 카메라의 특징은 패닝이 적극적으로 활용된다는 점이다. 좌우로 카메라를 움직이는 촬영기법인 패닝을 통해 쿠아론 감독은 '클레오'의 일상과 그녀의 주변 환경을 모두 담아낸다. 단지 인물의 행동뿐만 아니라 그 인물 주변의 공간 분위기까지 담아내면서 <로마>가 개인의 이야기와그 시대의 일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영화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카메라의 움직임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드는 것이 이 영화의 색채다.



3. 이 작품은 흑백영화다. 흑백영화는 컬러영화에 비해서 시각적인 재미는 부족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역으로 스토리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효과가 있다. 또한 감독들은 특별한 의도가 있을 때 흑백 필름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동주>의 경우, 이준익 감독은 '윤동주'라는 시인과 시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는 화려하고 컬러풀한 영상보다 담백한 흑백의 영상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고 밝힌 바 있다.


<로마> 역시 마찬가지다. <로마>는 스토리텔링의 시점이 가정부인 '클레오'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쿠아론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된다. 이때 흑백의 영상은 이 스토리가 과거 시점이라는 느낌을 강화해주며 인물들의 감정선을 강화하는 효과를 주며 아마도 이러한 효과를 쿠아론 감독은 의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키워진 가정부들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표시로, 마치 이준익 감독이 윤동주 시인에게 표한 존경의 표시처럼, <로마>의 화면을 흑백으로 채운 것이 아닌가 싶다.

 


4. <로마>를 보다 보면 독특한 면을 하나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은 작중에서 뭔가 특출한 배경음악이 없다는 것(혹은 영화를 보면서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배경음악이나 OST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외부에서 삽입되는 음악보다는 영상 내부의 대사와 음향, 노래가 스토리와 결합되면서 더 귀를 사로잡는 것이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영어 대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기에 러닝타임 내내 이국적인 스페인어의 운율과 리듬으로 인해 귀가 즐거웠다. 또한 산불을 진화하는 시퀀스에서 삽입된 노인의 노래는, 다소 이질적이면서도 가정의 불화가 시작되고 심화되는 스토리의 상징으로 그 안타까움과 처연함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명장면이다. <그래비티>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음향(사운드)을 다루는 데 있어서 경지에 다다른 듯한 느낌이다.



5. 위에 열거한 기술적인 특징들은 결국 모두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달려가는데, 바로 관객의 감성을 자극하는 스토리텔링이다. <로마>는 감독 본인의 자전적 이야기가 바탕이 된 작품으로 한 중산층 가정에서 일하는 가정부인 '클레오'가 주인공이다. 클레오는 작중 관찰자이자 동시에 서술자다. 자신의 가정이 파괴되고, 자신이 일하는 또 다른 가정의 파괴와 새로운 시작을 지켜보며, 동시에 멕시코라는 국가의 혼란을 지켜본다. 어찌 보면 극적인 요소(불륜/유산/폭동)가 가득할 수도 있는 스토리인데, 쿠아론 감독은 이 스토리를 아주 담담한 태도로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상술한 흑백의 영상, 느린 호흡, 수 차례 등장하는 롱 테이크 씬, 영상 자체의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음향까지 모두 관객들이 자극적인 사건 그 자체보다는 담백하게 '클레오'의 감정선을 따라가도록 도와준다. 이에 더해 <로마>는 디테일한 연출과 상징으로 스토리에 힘을 더한다.


연출을 보면, 유독 결정적인 스토리의 분기점마다 감독은 한 앵글 안에서 주인공과 대비되는 그리고 일상적인 인물들을 배치하며 주인공들의 심정을 우리에게 효과적으로 환기시킨다. 이미 이야기했던 클레오가 유산하는 장면에서 클레오와 의사/간호사들의 대비가 그렇다. 그리고 끝내 소피아 부인의 가정이 무너졌음이 확정되는 장면이 그러하다. 슬피 우는 가족들 사이에서 자주 보는 일이라는 듯이 무심하게 웨이팅을 하는 웨이터나, 슬픔에 빠져서 공원에 앉아 있는 소피아 부인의 가정 옆에서 축하연을 여는 막 결혼한 신혼부부가 한 앵글에 잡히는 모습은 많은 설명 없이 단지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인물들의 감정선을 잘 느낄 수 있다.


한편 영화 속 수없이 등장하는 개와 개똥은 작중 핵심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단지 클레오뿐만 아니라 모든 가정부들의 일상과  그들의 처우를 상징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클레오는 개똥을 닦고 있으며, 작중 개들은 가정부들과 유독 친밀한 관계를 보인다. 반면에 정작 개의 주인이자 클레오의 고용인인 소피아 부인과 안토니오 박사는 작중 그들의 소유인 개들과의 친밀감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안토니오 박사의 차가 주차를 하려다가 개똥을 뭉개버리는 씬은 호흡이 전체적으로 느린 작품의 톤을 감안해도 유독 길고 자세히 묘사된다. 반려동물과 주인의 관계, 또 클레오가 당시 시대적으로 최하위 계층인 멕시코 원주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사회와 계급적 문제를 떠올리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는 장면들이다.


결말부에서 물에 빠져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클레오가 구하는 씬 또한 클레오 개인의 이야기에서 공동 모두의 스토리로 확장된다는 점을 암시한다. 클레오는 아이를 잃은 경험을 떠올리며 비록 자신의 아이는 아니지만 필사적으로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해낸다. 작품 내 어느 시점보다도 소피아 부인에게 깊이 공감을 표하는 장면으로 클레오는 자신의 아픔에 머무를 뿐만 아니라 타인들의 아픔을 깊이 느끼게 된 것이다. 이 씬이 후반부에 배치된 이유를 생각해보면 쿠아론 감독이 <로마>를 통해 말하려던 바를 유추할 수 있다. 결국 <로마>는 좁음에서 넓음으로, 개인에서 공동체로, 특수에서 보편으로 확장을 이야기한다. 클레오라는 개인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공동체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이다. 즉, 관객은 완전히 클레오에게 공감하고, 클레오의 시선으로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슬픔과 아픔과 사연을 보고 듣고 공감하며 본인과 자신의 주변까지도 이야기를 넓힐 수 있다. 그렇기에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의 진수다. <그래비티>가 쿠아론 감독이 힘을 잔뜩 주면 어떤 영화를 만드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라면, <로마>는 그가 힘을 빼면 어떤 작품이 나오는지 보여주는 영화다.  

 

O (Outstanding 특출함)

빼기의 미학. 뺄수록 마음에  꽂히는 너와 나와 우리의 이야기.



매거진의 이전글 트와일라잇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