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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oDAY Aug 28. 2019

반걸음 전진한 여성 스파이 활용법

<안나> 리뷰

1. 첩보 영화는 보통 두 가지 제작 방식이 있다. 하나는 <007>과 <킹스맨> 시리즈 마냥 약간의 판타지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방법이다. 또 다른 하나는 스파이로 활동하는 인물들의 고충과 정서에 보다 초점을 맞춰 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방식이고. <본> 시리즈가 후자의 대표 격인 작품이며, 이러한 작품들을 '에스피오나지' 영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에스피오나지 장르는 <007>처럼 활극의 요소가 가미된 첩보 영화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다. 이 영화들은 냉전 시대, 두 진영 간의 대립과 갈등 사이에서 스스로의 정체성과 인간성을 두고 고민하는 스파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서늘하고 차가운 분위기가 특징이기도 하고. 다만 냉전이 끝난 지 오래된 현시점에서 에스피오나지 장르는 자신만의 매력만으로 관객들을 매료시키기에는 부족함이 많아졌다. 자칫하면 올드하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근래에 에스피오나지 장르는 냉전이라는 시대상을 벗어나는 변화를 추구한다. 예를 들어 <본> 시리즈는 냉전 이후를 다루면서 '제이슨 본'의 자책감을 심도 있게 묘사함과 동시에 더 이상 바랄 곳이 없는 액션과 편집의 경지를 보여줬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는 히어로 영화와의 결합을 통한 변화와 확장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뤽 베송 감독의 신작, <안나>도 마찬가지다. <안나>는 에스피오나지 장르 고유의 내러티브를 전체적으로 이어가면서도 영화의 편집과 캐릭터에 있어서 변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이 시도는 반쯤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   



3. <안나>의 초반부 전개는 신선하다고 느낄 구석이 없으며 에스피오나지 장르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난다고 볼 수도 있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 시궁창 인생을 살던 약쟁이 여자가 살인 병기가 되는 전개. 그리고 스파이의 삶에서 다시 벗어나 자유를 되찾고자 하는 갈망. 이해할 수는 있지만 이미 너무 자주 접한 설정이다. 작중 등장하는 노트북과 핸드폰의 등장은 과거의 향취보다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의 어중간함을 보여줄 뿐이고.


이러한 진부함과 올드함을 <안나>는 편집의 힘으로 감추고자 한다. 영화 전반에 걸쳐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플래시 백이 그 주인공이다. 실제로 영화를 보는 내내 플래시 백이 과하게 많다는 생각을 떨쳐내기 힘들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플래시 백을 남용하는 다른 영화들처럼 흐름이 끊기거나 영화 내에 서스펜스가 길게 지속되지 못하는 문제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맨 오브 스틸>처럼). 물론 스파이의 삶을 다룬 첩보 영화에서 지속 가능한 긴장감이 없다는 것이 결코 긍정적인 부분이 아니다.   


그러나 영화 초반부만 해도 과거사를 설명하는 용도로 보였던 플래시 백은 거듭되는 반복을 통해 <안나>라는 영화의 정체성을 이루는 데 성공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비선형적으로 전개되는 시간 그 자체가 영화 고유의 매력이 된 것이다. 실제로 후반에 이르면 관객들은 연속되는 반전에 대비하고자 영화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서스펜스 대신 서프라이즈를 선택하는, 첩보 영화로서 스릴러의 특징을 포기하는 독특한 선택을 한 셈이다. 그리고 <안나> 속 플래시 백은 엔딩에서 또 한 번 그 위력을 발휘한다.  



4. <안나>는 약 2시간 동안 전형적인 팜므파탈인 '안나'의 모습을 보여준다. 권력과 부를 손에 쥔 수많은 남성들은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해 파멸에 이른다. 그녀는 감독의 다른 여성 캐릭터들처럼 강인하다. 그녀가 손에 쥔 권총은 순간적으로 남성들을 압도하는 권력이다. 그러나 그녀도 자유로운 삶을 미끼로 내민 KGB와 CIA에 철저히 이용당하고, 끝내 파멸한다. 그렇기에 여기까지만 보면 안나라는 캐릭터는 그저 관습적인 팜므파탈 중 하나로 기억돼도 놀랍지는 않다. 


그런데 이 영화의 마지막 플래시 백은 2시간 동안 지켜본 안나라는 인물의 캐릭터성을 180도로 돌려놓으며 가장 큰 반전을 선사한다. 결말에 이르러 그녀는 주변인들과 함께 파멸하는 인물이 아니라 주도적인 위치에서 자신의 자유와 목적을 위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캐릭터로 재탄생한다. 단지 남성을 이용하고 남성에게 이용당하는 것이 아니라 유사 모녀 관계를 통해 여성 간의 협력 관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안나는 고착된 팜므파탈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여성 스파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부분은 편집과 캐릭터 상에서 이루어진 변화의 노력이 반쯤은 성공이라고 생각한 이유이기도 하다.



5. 하지만 <안나>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한 가지 존재한다. 바로 액션이다. 우선 영화 자체가 드라마에 집중하고 있어서 액션의 비중 자체가 크지 않다. 또 그나마도 퀄리티가 좋은 편은 아니다. 작중 크게 두 번의 액션 시퀀스가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는 <킹스맨> 1편을 어설프게 따라한 듯한 느낌이 강했다. 모델답게 다양한 마스크를 보여주면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과는 별개로, 샤샤 루스가 액션을 잘 소화한 것 같지도 않고. 


<솔트>와 <아토믹 블론드>는 물론 MCU의 블랙 위도우까지 뛰어난 액션을 보여준 여성 스파이가 등장한 마당에 <안나>의 액션은 기획과 결과물 모두 안일하지 않았나 싶다. 만약 시원한 액션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6. 지금까지 여성 스파이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은 종종 있었다. <솔트>, <레드 스패로우>, <아토믹 블론드> 등. 이 영화들에 비해 <안나>가 더 뛰어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주연을 맡은 샤샤 로스의 존재감은 안젤라니 졸리, 샤를리즈 테론, 제니퍼 로렌스를 결코 따라가지 못하며, 서스펜스의 부재처럼 영화 자체의 완성도도 부족하다. 


하지만 여성 스파이의 두 가지 정체성, 여성과 스파이 중 '여성'이라는 정체성에서 긍정적인 변화와 진보를 보여줬다는 점만큼은 <안나>만의 특징이자 다른 작품들과의 차이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올드하고 진부하나 반 걸음은 전진한 여성 스파이 영화, <안나>다. 



A(Acceptable, 무난함)

'꼭 냉전시대여야 했나' 그리고 '이렇게 플래시 백을 많이 사용했어야만 했나'라는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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