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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oDAY Jan 10. 2019

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

피해자이면서 또 피해자인 그들

1. <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은 '베를린의 한 여인'으로도 알려진 책으로 1945년 4월 20일부터 6월 22일까지 소련군에 함락되었던 베를린 실황을 익명의 한 여인이 기록한 일기이다. 암담한 상황에도 불궇고 전체적으로 당시 상황을 아주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문체가 매우 인상적이기도 하다. 필자는 직접 경험한 일들을 토대로 자신의 생각을 일기에서 굶어가는 와중에도 펼쳐낸다. 그렇기에 <함락된 도시의 여자>는 필자가 살았던 당시 그 시대를 가장 생생하게 포착한 역사 그 자체다.


영화 <베를린의 한 여인> 스틸 컷


2. 일기의 가장 큰 줄기는 베를린 집단 강간이다. 사실상 여자들만 남은 도시에서(당시 베를린 인구 중 70%가 여성) 소련군의 등장은 순수한 두려움 그 자체였다. 이유는 단 하나. 강간에 대한 공포였다. 실제로 당시 독일 여성 중 최소 50만에서 최대 100만 명 가량이 소련군에 의해 강간당했다고 한다. 일기는 이 시기 인물들이 입었던 피해를 사실적으로 전달하며 한 인간이 그 존엄성을 훼손당했을 때 경험하는 고통을 묘사한다.


두려움과 고통의 묘사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그 사이를 메꾸는 것은 다름아닌 성매매에 대한 고찰이다. 필자는 무자비하고 무작위로 발생하는 강간과 극심한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소련군 장교와 관계를 맺기로 결심한다. "인간은 인간에게 모두 늑대"라는 홉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소련군 장교를 방패막이이자 후원자로 삼은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대가를 바라면서 소련군과 관계를 맺는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비난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창녀는 아니라며 합리화하지만, 동시에 결국 자신이 하는 일이 성매매와 다를게 무엇인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는 것이다.  


이처럼 필자는 독일의 여성들이 입은 피해와 트라우마를 생생히 전달하면서도, 상대편인 소련 여성들에 대한 언급도 잊지 않는다. 독일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소련 여성들도 침략군인 독일군에 의해 강간당하고 폭행 당했었다. 작중에는 독일 여성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는 장교에 대해 한 소련 병사가 '자신의 누이들과 어머니들은 모두 독일군에 의해 강간당했다'면서 항변하고, 이에 대핸 독일 여성들은 독일 정규군이 아닌 나치 친위대에 의한 일이었을 것이라며 그 죄책감과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필자는 자신의 상처, 주위 사람들의 상처 뿐만 아니라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고찰을 보여준다.


전후 베를린을 복구하는 독일 여성들


3. 이처럼 작중 등장하는 베를린 집단 강간 사건은 2가지 측면에서 깊게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어째서 독일은 전후에 그토록 뼈아픈 성찰과 반성과 사죄가 가능했는지에 대한 해답이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소련에 의해 피해를 입었지만 동시에 소련에 입힌 피해를 직접 체감한다. 소련군을 직접 대면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스로 피해자 이전에 가해자라는 것을 체감하고 그 트라우마로 인해 '죄는 없어도 책임은 있는' 현재 독일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하나는 여성 인권에 대한 문제다. 베를린으로 소련군이 향하고 있는 그 시점에, 베를린에 있는 여성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공포에 휩싸인다. 소련군의 실제 적은 나치 독일이지, 여성들이 실제적인 적군이 아니라는 점은 누가 보더라도 분명하지만 그 시점에서 이러한 이성적 판단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전시 상황이라는 특수성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평시에 뿌리깊게 박혀 있던 남성적 시각이 전시라는 특수상황에서 극대화 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에 종속된 존재라는 젠더 관계, 잘못된 성 권력관계의 일면인 셈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얼마나 떳떳한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다. 우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에게 사죄하고 배상하라고 요구한다. 이는 당연한 처사다. 하지만 피해자로서 생각하고자 한다면, 가해자로서의 우리 모습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무슨 말이냐고? 베트남 전쟁에서 우리 군이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진술이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역시 외면만 할 일은 아닌 셈이다.



4. 이처럼 베를린 집단 강간 사건이 책의 주요 내용을 이루는 가운데 다른 주제에 관해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작가의 서술은 놀랍기만 하다. 예를 들어 악의 평범성을 엿볼 수 있는 짤막한 언급이 있다. 필자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언급을 하며, 장부까지 만들어서 유대인 학살을 관리한 상황을 독일인 답다고 평한다. 도덕적 가치와 무관하게 그러한 일상성과 평범성이 악의 핵심이라는 것을 한나 아렌트 이전에 필자는 벌써 포착해낸 셈이다.


또한 베를린 집단 강간 사건의 피해자인 여성들이 자기파괴적인 유머를 통해서 서로를 위로하고 추스르는(물론 그런다 한들 그 상처가 사라질 리는 없겠지만) 모습들은 극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찾는 인간의 본성 등 평범한 상황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숱한 인간성을 포착한 기록이다.


5. <함락된 도시의 여자>는 익명으로 발행되었기에 과연 이 책이 사실을 기반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픽션에 불과한 것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은 후에 느낀 점은, <함락된 도시의 여자>는 역사서로서의 자격도 충분하지 않나 싶은 것이다. 그 이유는 유시민 작가를 인용해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유시민 작가는 <역사의 역사>에서 역사는 역사가가 만드는 것이며(사실을 포착해 이를 편집해 엮는 것이기에), 그때 역사는 스토리가 있어야 매력적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함락된 도시의 여자는>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무치게 가슴 아프고, 경탄을 자아나게 하는 스토리가 있으며 역사학자들이 인정할 만큼 사실에 근거한 것이 분명하기에 개인적인 일기이자 모두를 위한 역사책임이 확실하다.



소련군에 의한 강간 피해자지만, 전쟁 가해국 국민이라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한 중복의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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