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등학생 때 국어 선생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있다. "문학은 뭐라고? 문학은 제목이야. 왜냐고? 제목만 제대로 읽어내도 니들이 작품의 반은 알 수 있어." 선생님은 제목이 문학작품의 배경, 주제, 소재를 함축적으로 드러낸다며 항상 제목을 통해 작품의 함의를 찾는 연습을 시키곤 했다. 물로 성격이 급한 나는 먼저 지문을 읽어야만 성미가 풀렸기 때문에, 작품의 제목은 내게 문제를 다 풀고 나서야 뒤늦게 확인하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랬던 내가 어느 책을 읽으면서 제목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결국 그날이 오고 말았다. 왜냐하면, 랩 걸은 제목에 정말 책의 모든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2. 랩(Lab)은 실험실(Laboratory)의 준말이다. 실험실은 과학이라는 학문의 뿌리가 되는 장소로 과학자들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그곳에서 과학자들은 당장 우리에게 도움은 되지 않아도 알게 되면 언젠가 매우 유용할 우주의 이치를 발견한다. 하지만 랩은 단지 실험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 책에서 랩은 과학 중에서도 순수과학(공학계열을 제외한 물리학, 의학, 생명과학, 지구과학 등)을 뜻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과학 그 이상의 의미도 있었다. 내게 '랩'이란 단어는 인문학을 포함한 모든 순수학문과 그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책의 저자인 호프 자런은 지구화학 분야의 권위자다. 하지만 그녀 또한 숱한 역경을 겪었야만 했다고 <랩 걸>에서 술회한다. 사실 이 책의 절반은 그녀가 자신의 연구비용을 어떻게 충당했는지, 그 비용을 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비용이 없을 때면 파트너인 빌과 어떻게 연구를 지속했는지에 관한 내용이다. 그녀는 이 과정을 나무에 빗대서 설명한다. 마치 나무들이 빛이 충분한 여름에만 성장하고 겨울에는 성장을 멈추듯이 호프는 그녀를 비롯한 자연과학자들의 연구가 나무와 다를 것이 없다고 푸념한다. 연구비가 나오는 시기에는 미친 듯이 연구에 임하지만 그렇지 못한 시기에는 뭐...
그럼에도 <랩 걸>은 경제적 어려움과 관계없이 본인이 선택한 꿈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호프의 강인한 의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가 느껴짐과 동시에 스스로가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대학을 입학할 때만 해도 인문학 공부를 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학교를 다니면서는 취업에 도움이 될 전공을 고민하며 아직 전공조차 선택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위안 아닌 위안이 되는 것은 이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돈이 되지 않는 전공, 그러니깐 인문학이나 자연과학을 공부하거나 업으로 삼겠다는 말이 평생 돈 없이 살겠다는 말과 동의어가 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는 순수학문이 당장 경제적 이익을 내기 어려운 연구라는 본질적 특성으로 인해 사회적 차원의 기반 및 비용 지원이 어렵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실제로 호프 자런 역시 <랩 걸>에서 본인이 원하는 식물 연구를 하기 위해 경제적 지원이 가능한 다른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랩 걸>의 '랩'은 과학자가, 그리고 다른 학문 분야의 학자들이 같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였다.
3. <랩 걸>이라는 제목의 나머지 한 글자는 걸 Girl이다. 즉, 이 책의 나머지 절반은 예상대로 '여성'으로서 그녀가 경험한 것에 관한 내용이다. 그녀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했던 성차별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호프 자런은 두 가지 줄기를 통해 그녀가 당한 성차별을 이야기한다. 하나는 그녀의 어머니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가 임신했을 때의 에피소드다. 그녀의 어머니는 호프 못지않게 영리한 영문학을 전공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했다. 하지만 호프 자런이 가장 분노한 지점은 그녀의 어머니가 커리어를 포기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 또한 커리어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분노했던 것이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녀가 임신을 했을 때 에피소드를 보면 그녀의 분노가 충분히 이유가 있었음이 드러난다. 그녀는 임신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꾸민 실험실 출입마저 금지당했었다. 단지 학교와 총장이 그런 경우를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랩 걸>에서 호프는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투쟁해서 그녀의 권리를 얻어냈는지를 말하며 이것이 단지 여성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운동장 자체의 문제 거나 투명한 천장의 문제라는 점을 꼬집는다.
그렇기에 <랩 걸>은 단순히 한 여성 과학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학자이자 여성으로서 이중고의 어려움을 이겨낸 한 인간의 도전과 성취의 스토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녀가 자신의 성취를 그녀의 전문분야인 식물을 통해 풀어냈다는 점이다. 마치 그녀를 차별한 사람들에게 증명이라도 해내듯이. 잎이 가시가 되더라도,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한이 있어도 나무가 살아남듯이 호프 또한 나무처럼 뿌리내린 후에 악조건을 뚫고 성장했다. <랩 걸>은 호프 자런이라는 나무의 열매가 아닐까.
나무는 아름답다.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하더라도 하늘에 닿기 위해 끝없이 자라나는 시도가 아름답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