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애기를 떼 본 적 있느냐고 묻죠.” 이만희 감독의 <휴일>(1968)에서 ‘허욱(신성일)’이 술집에서 만난 여성에게 남자들과 자봤냐고 묻자 그녀가 대답한 말이다. 이 대사는 서울 시내를 바쁘게 돌아다니며 애인인 ‘지연(전지연)’의 중절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애썼던 허욱의 하루를 짐작케 한다. 허욱의 일요일을 카메라는 차갑고 담담하지만 일말의 연민을 품은 시선으로 담아낸다.
영화는 허욱이라는 한 남자의 일요일을 담담히 보여준다. 허욱은 지연을 만난 후 중절 수술을 하기로 결정한다. 이후 친구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로부터 돈을 빌리려고 한다. 대학을 나왔지만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친구, 하루에 목욕만 6번을 하는 친구, 대낮부터 섹스에 찌든 친구까지... 허욱의 친구들은 휴일답게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영화는 의미심장하거나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지 않는다. 작중 시간도 알려주지 않는다. 수술비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허욱과 그를 기다리는 지연의 모습이 교차되어 등장할 뿐이고, 술집에서 만난 여성과 보내는 시간은 4분의 시퀀스로 짧게 등장한다. 이때까지 허욱은 애인을 버린 파렴치한으로 보이며, 영화도 그를 차갑고 담담하게 내려다본다.
하지만 종이 울린 후부터 카메라의 시선은 약간의 변화를 맞는다. 위에서 아래로 허욱과 그에게 도둑맞았던 친구가 싸우는 광경을 내려다보는 카메라의 구도는 작중 내내 흩날리는 먼지들과 앙상한 건물들, 피폐한 공사장의 모습과 어우러진다. 처절하고 쓸쓸한 이 장면은 영화 초반부 돈도 없고, 직업도 없어 보이나 여유롭고 능글맞던 허욱의 모습과 대비를 이루고 그가 처한 어두운 영화 속 현실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60년대, 민주화에 성공한 줄 알았지만 다시 독재의 군홧발에 짓밟힌 그때. 돈도 없고 직업도 없고 할 일도 없는 청년들의 주먹다짐과 춥고 황량한 서울을 담아내는 카메라. 인물들과 함께 서울 시내를 따라가는 카메라의 시선은 어둡고 무서운 서울과 시대상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며 영화가 제작된 1968년에 개봉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암시한다.
정처 없이 길을 달리는 허욱의 모습, 중간중간 플래시백으로 흑백이 대비되며 스쳐 지나가는 그와 지연의 행복했던 나날들. 그리고 전차 끝에 놓인 끊어진 철도를 보면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바라보는 그의 허망함, 무력함,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실망. 한심하면서도 처절한 허욱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를 이해하고, 연민하다가 남의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금 우리의 휴일을 두고 얼마나 뜻깊고 밝다고 말할 수 있을까. 허욱을 보다가 스스로를 보고 옆을 둘러보는 순간, <휴일>은 60년이 세월을 뛰어넘어서 우리에게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