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4일 오후 2시, 조국 법무부 장관이 임명 35일 만에 사퇴했다. 같은 날 오후 6시경, 아이돌 그룹 f(x)의 전 멤버이자 배우 설리(본명 최진리)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가운데, 사람들의 분노는 같은 대상으로 향하고 있다. 바로 언론이다.
권력의 감시자가 아니라 행위자로 나선 언론
지난 9월 28월, 검찰 개혁을 외치는 서초동 집회에서는 흥미로운 장면이 JTBC 뉴스룸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시민들은 “돌아오라, 손석희”라는 피켓을 든 채 손석희 JTBC 뉴스룸 메인 앵커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JTBC을 포함한 언론들이 이른바 조국 정국에서 검찰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과 유착해 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한국 기자협회 윤리강령 및 실천요강’에 따르면 기자는 공정보도, 올바른 정보 사용, 사생활 보호, 취재원 보호, 갈등 차별 조장 금지 등의 강령을 준수 및 실천해야 한다. 기자들은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나라의 민주화에 기여할 시대적 소명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2달간 목격한 언론의 모습은 시대적 소명을 안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최근<유시민의 알릴레오>에서 공개한 정경심 교수의 자산 관리인인 한국 투자증권 감경록 차장과 KBS의 인터뷰 녹취록은 언론의 참모습은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들은 인터뷰 내용을 필요한 맥락에 맞춰 재구성하고, 검찰 수사를 받는 피의자의 인터뷰 내용을 검찰에게 재확인하고 있었다.
의혹과 팩트를 섞어 요점을 흐리는 보도. 관행이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진 검찰과의 유착. 권력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조종하고 직접 정치에 뛰어든 또 하나의 권력. 시민들이 2달간 목격한 한국 언론의 현실이다.
악플을 비판하기 전에 자아성찰을 먼저 하시죠
상업적 이익에 눈이 멀어버린 언론
언론이 유명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으면서 조그마한 이슈를 가지고도 조휘 수를 높이려는 목적으로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를 쏟아내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로 대형 포탈의 연예란에 들어가면 연예인들의 인스타그램 내용까지 기사화한 글들을 수없이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설리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언론들의 행태는 저널리즘의 측면은 물론 도의적 차원까지 넘어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사망 사건을 전하면서 과거 논란이 되었던 설리의 가슴 노출 사진을 걸어 놓았다가 논란이 되자 사진을 바꾸는가 하면, 유족들의 부탁도 무시한 채 빈소 위치를 공개하는 추태를 부리기도 했다. 자신들이 나서서 설리의 사진들을 기사화했었던 과거는 잊고 네티즌들의 악플이 이번 사건의 원인이라고 몰아가는 내로남불까지 선보이는 중이다.
한국 기자 협회에서는 <자살보도 윤리강령>을 통해 ‘흥미를 유발하거나 속보 및 특종 경쟁의 수단으로 자살 사건을 다루어서는 안’되며, ‘자살 보도에서 자살자와 그 유족의 사생활이 침해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속보와 조회수 경쟁, 상업적 이익에 목을 매는 언론사들에게 더 이상 직업윤리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2019년 10월 14일, 언론들에게 주어진 기회
시민들은 언론에 분노했다. 주어진 사명을 다하지 않고 스스로 권력을 휘두르고, 마땅히 지켜야 할 윤리마저 외면하는 모습에 분노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 민주화 운동에서 촛불 혁명까지 언론들이 때때로 욕을 먹으면서도 권력의 감시자, 시민들의 대변인으로서 사명을 다했던 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2019년 10월 14일은 한국 언론들에게 결정적인 한 순간으로 남게 될 것이다. 시민들의 믿음에, 마지막으로 내어준 기회에 보답할지 안 할지는 오롯이 언론의 몫이기 때문이다. 단, 시민들이 이미 SNS와 유튜브를 통해 자체적으로 뉴스를 생산하고 공유하고 소비하면서 언론들의 프레임을 벗어나고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둬야겠지만.
모든 언론이 김수환 추기경의 한 마디를 기억하기를 바라며
언론이 진실을 보도하면 국민들은 빛 속에서 살 것이고,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며 어둠 속에서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