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와 채식권
11월 12일, 내년 초 입대를 앞둔 정태현 씨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을 상대로 한 이 진정서는 ‘국군 장병의 채식권을 보장하라’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병영 생활 개선의 기치 아래에서 병영 내 핸드폰 사용 등 다양한 정책들이 추진 중인 가운데, 정 씨의 진정서는 군 장병들의 처우에 관한 또 다른 논쟁에 불을 붙였다.
채식권이 말살된 병영
현재 병영 내에서 채식, 특히 비건의 식사권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정 씨가 “김치조차 액젓이 들어가 있어 먹을 수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쌀밥을 제외하면 국과 반찬에 어떤 형태로든 육류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군대리아가 나오면 밥마저 제공되지 않고, 샐러드드레싱마저 계란을 포함한 마요네즈로 만들어지기에 비건들은 시리얼을 제외하면 전혀 먹을 수 있는 것이 없다.
기본 식단만의 문제가 아니다. 추가 간식으로 제공되는 증식에서도 채식권은 보장받지 못한다. 대한민국 국방부 홈페이지에 공개된 증식 메뉴 중 채식주의자들이 먹을 수 있는 메뉴는 한 달에 두 번 나오는 떡이 전부다. 그 외에 제공되는 라면과 쌀국수는 소고기 조미료를 포함하며, 비건의 경우 우유가 들어가는 건빵도 섭취할 수 없다.
한국 채식 연합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채식 인구는 100만에서 150만 명으로, 전 국민의 약 2~3%에 이른다. 한편, 현재 국방부는 약 58만의 국군 장병 중 채식주의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도 파악하지 않고 있다.
군대 내 채식권에 부정적인 시각들
정 씨가 제출한 진정서에 반대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군대의 특수성에 비춰 봤을 때 채식주의를 보장하기 어렵고, 병역 의무를 이행하면서 개인의 취향이나 편의가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방부도 “단체 급식에서 개인 취향을 맞추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9사단 소속의 한 상병은 “군 생활을 하는 동안 채식주의자를 만난 적도 없고, 몇몇 입맛을 위해서 취사병들의 수고를 더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라면서 정 씨의 진정서에 우려를 표했다.
내년 초 입대 예정인 한 대학생도 “초, 중, 고등학교 급식에도 채식 메뉴를 제공하지 않고, 일반 식당에서도 비건용 메뉴를 따로 제공하지 않고 있는데 굳이 군대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채식 식단을 제공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국방부는 채식권 보장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
국가인권위의 진정 심사는 최대 1년이 걸릴 예정이며, 정 씨 측 변호사는 진정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문제는 인권위의 권고가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점이 문제다. 국가인원위는 2012년 “교도소 내 채식권을 보장하라”라고 권고한 바 있으나, 현장의 변화는 없었다.
다만 현재 국방부에는 채식권 보장을 거부할 명분이 없다. 단체 급식에서 개인 취향을 맞추기 어렵다는 국방부의 입장부터 자가당착이다. 국방부는 이미 각 부대에 자율운영 부식비를 제공하는 등 개인 기호에 따른 장병의 급식 선택권을 보장하고 있다. 징병제라는 한국군의 특수성도 이유가 될 수 없다. 우리처럼 징병제를 채택한 이스라엘은 2017년부터 비건 식단과 비건 군복을 제공하고 있다. 이외에도 미국, 캐나다, 리투아니아 등 군대 내 채식 메뉴를 제공하는 사례는 많다.
개인의 취향이나 편의를 배려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채식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결과다. 동물권 혹은 환경권 등의 신념과 양심을 이유로 채식주의를 선택한 이들에게 동물성 식품은 음식이 아니라 동물 사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채식권은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행복 추구권, 양심의 자유, 건강권 등 헌법이 명시한 기본권과 관련된 문제다.
단지 채식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2018년, 국방부는 ‘국방개혁 2.0’ 계획서를 공개하고 “국민 눈높이의 인권, 복지를 구현하여 사기 충만한 병영문화”를 정착시켜 선진병영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만약 헌법상 기본권인 병영 내 채식권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국방개혁과 선진병영은 그저 빈말에 불과할 것이다.
과연 시민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해 ‘선진병영’을 실현할 것인지, 아니면 ‘선진병영’도 그저 공허한 문구 중 하나로 만들 것인지. 선택의 갈림길에 선 국방부의 행보에 관심이 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