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매킨토시 발표회. 신제품 출시 프레젠테이션을 앞두고 '스티브 잡스(마이클 패스밴더)'는 특유의 완벽주의로 인해 '조안나 호프만(케이트 윈슬렛)', '스티브 워즈니악(세스 로건)' 등과 갈등을 겪는다. 한편 잡스의 딸 리사와 그의 어머니 '크리산(캐서린 워터스턴)'은 발표를 앞둔 상황에서도 잡스의 마음 한 켠을 불편하게 만든다. 수많은 갈등과 대립을 뒤로한 채, 든든한 지원군인 '존 스컬리(제프 다니엘스)'의 응원 속에 스티브 잡스는 다시 한번 무대 위로 나선다.
프레젠테이션 무대 위에서 청바지와 검은 티셔츠를 입은 남자. 사람들이 스티브 잡스를 가장 직관적으로 기억하는 이미지가 아닐까. <스티브 잡스>는 바로 그러한 이미지를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히 영화의 구성이다. <스티브 잡스>는 잡스 인생 중 그의 몰락과 재기를 보여줄 수 있는 3개의 프레젠테이션이 펼쳐지기 직전 각 40분 간의 상황을 묘사한다. 그리고 굴곡 심한 한 인물의 인생을 단 120분으로 요약하겠다는 이 대담한 시도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들어 냈다.
세 차례의 발표회는 스티브 잡스의 커리어와 인간관계 상의 성공과 실패를 정반합의 구조로 풀어낸다. 첫 번째 1984년 매킨토시 발표회는 잡스를 소개하고, 그의 긍정적인 면모를 적극적으로 묘사한다. 첫 40분 동안 잡스는 물리적인 시간 내에 불가능한 일을 동료들이 해내도록 만드는 등, 매킨토시 발표회라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과정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편 딸 리사를 만나 그녀에게 컴퓨터를 알려주는 등 까칠한 외면과 다른 내면의 따뜻함을 보이기도 한다.
두 번째 1988년 NeXT 발표회는 영웅의 추락을 보여준다. 애플의 CEO였던 '스컬리(제프 다니엘스)'와의 언쟁, 절친 워즈니악과의 갈등, 한 언론사 기자와의 비공개 인터뷰 등은 잡스의 자신감이 어떻게 그의 상황 판단을 흐리고 그를 실패의 길로 이끌었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리사와의 관계 역시 악화일로를 걷는다.
세 번째 1998년 아이맥 발표회는 기사회생한, 부활한 영웅을 묘사한다. 잡스는 농담도 할 줄 알고, 리사와 다른 이들의 말을 들을 줄도 알고, 과거 자신의 잘못도 인정한다. 시대 순에 맞춰서 영화의 화질이 점점 좋아지는 연출은 기술의 변화와 더불어 작중 잡스의 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앞선 두 번의 발표회에서 나타난 극단의 잡스 사이에서 마침내 균형을 잡은 것처럼. 이렇게 스티브 잡스는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지휘자'로 성장한다.
한편, 세 번의 발표회에 집중한 영화의 전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조성되는 서스펜스를 이끌어낸다. 하나는 프레젠테이션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잡스와 그의 팀의 모습이 형성한 서스펜스다. 이미 역사를 아는 관객과 역사를 모르는 인물 간의 이질감이 주는 긴장감이기도 하다. 잡스가 엔지니어니 '앤디 허츠필드(마이클 스털버그)'를 극도로 몰아붙이거나, 예상치 않은 문제가 발생해 스티브 잡스와 조안나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다.
다른 하나는 잡스의 주변 인물 사이의 관계가 형성하는 서스펜스다. 특히 각 인물 별로 다른 편집 스타일은 이 긴장감을 최대치로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서 스컬리와 잡스의 갈등은 플래시 백을 통해 절정에 달하지만, 워즈니악과 잡스의 갈등은 시간 순서의 변화 없이 둘의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극대화된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서스펜스의 조성도, 과감하고 도전적인 플롯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이나 그에 대한 여러 책들을 읽어도 영화가 재현한 여러 인물 과의 관계, 그의 성공과 실패, 그의 개인사 등은 알 수 있다. 잡스라는 인물이 수십 년간 쌓아 온 스토리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가 전하는 강렬한 서스펜스와 감정은 그 어떤 매체와도 다르며, 애쉬튼 커쳐가 주연을 맡은 <잡스>와는 더더욱 다르다.
이는 <스티브 잡스>의 플롯이 프레젠테이션 직전 40분이라는 시간의 한계 안에 강력한 인과관계를 바탕으로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수십 년이나 되는 스티브 잡스의 인생사에서 감정의 고조가 뚜렷한 순간들만을 골라내고, 현실과는 다른 영화 만의 인과관계를 바탕으로 각각의 40분 안에 그 순간들을 재배열해 잡스의 인생을 최대한으로 집약시킨 것이다.
현실의 수십 년을 요약하면서도, 영화 속 사건의 진행 시간과 영화 러닝타임이 일치시키는 구성. 그 결과 실제 스토리의 흐름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지니는 내러티브의 구축. 잡스가 만든 컴퓨터와 그의 딸이 리사라는 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이유, 그가 컴퓨터가 아닌 mp3 사업에 뛰어들어서 아이팟을 만들게 된 계기 등에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이 영화의 플롯이 성공적이라는 사실은 반박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는 <소셜 네트워크>에서 이미 위인전과 법정영화에서 화자와 사건의 시간 순서를 혼동시키면서 재미를 만들어냈던 각본가 아론 소킨의 놀라운 재주이기도 하다.
따라서 <스티브 잡스>는 관객과 인물, 관객의 시간과 영화의 시간, 실제 이야기와 각본이 재구성한 내러티브의 관계 사이에 내재된 에너지가 극단으로 표출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출 난 인물의 사사로운 이야기를 훔쳐보는 듯한, 영화의 본질이기도 한 관음증적인 재미를 스티브 잡스라는 시대의 아이콘을 통해 충족시키는 것은 덤이다. 스티브 잡스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릴 것이고, 그렇기에 영화 <스티브 잡스>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역동성만큼은 쉽게 거부하기 힘들지 않을까.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영화와 현실, 영화와 관객 사이의 관계가 뿜어내는 에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