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noDAY Feb 10. 2020

<나이브스 아웃>, 비수를 품은 뉴트로 추리극의 등장

<나이브스 아웃> 리뷰

*스포일러가 포함된 리뷰입니다.


1. 베스트셀러 미스터리 작가인 '할런 트롬비(크리스토퍼 플러머)가 85세 생일날 죽은 채 발견된다. 그의 사망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경찰과 함께 사립 탐정 '브누아 블랑(다니엘 크레이그)'이 트롬비 저택에 파견 온다. 트롬비 가족들과의 면담 후 진실이 숨겨져 있다고 판단한 블랑은 거짓말을 하면 구토하는 할런의 간병인 '마르타(아나 디 아르마스)'와 함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수사를 시작한다.


사람들이 추리 소설, 영화 등에 매료되는 이유는 주인공의 매력, 인물들의 미묘한 심리 변화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반전이다. 독자나 관객은 스토리 진행을 따라가면서 나름의 추리를 통해 범인을 유추하는데, 이때 작품의 반전은 카타르시스와 같은 감정을 선사하면서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 그렇기에 작가가 적절하게 추리 단서를 흘리고, 그 단서들을 효과적으로 비틀 때 독자들의 흥미도 극대화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라이언 존슨 감독의 <나이브스 아웃>은 관객들이 흥미로워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추리 영화의 클리셰와 클리셰 비틀기가 적절히 섞여서 강력한 흡입력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2. <나이브스 아웃>은 전체적으로 추리 영화의 장르에 충실한 작품이다. 스토리텔링 방법도 그렇다. 이 작품은  후더닛(Whodunnit) 영화, 즉 '누가 사건을 저질렀는지'를 따지는 영화의 전개 방식을 보여준다. 실제로 영화는 먼저 사건을 보여준 후, 뛰어난 능력을 지닌 탐정이 등장해 범인은 누구이고 범인이 사용한 범행 방법은 무엇인지를 쫓는 순서로 전개된다.


스토리텔링 기법 외에도 <나이브스 아웃>에는 고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추리 영화의 클리셰가 가득하다. 예를 들어 몇 가지 속임수가 숨겨져 있으면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뽐내는 트롬비 저택의 경우 영화가 지향하는 장르적 특징을 시각적으로 제시하는 공간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영화는 추리물답게 관객들이 스스로 추리할 수 있는 힌트를 제공한다. 마르타의 운동화에 묻은 혈흔을 클로즈업하기도 하고, 각종 트릭의 방식이나 각 인물들의 비밀을 제시하면서 의심을 유발한다. 다니엘 크레이그, 마이클 섀넌, 제이미 리 커티스 등 적재적소에 배치된 배우들의 열연은 그 의심을 더욱 증폭시킨다. 이외에도 사건의 실체를 공개하기 위해 모든 등장인물들을 한데 불러 모으는 장면 또한 추리극의 대표적인 클리셰다.



3. 그러나 <나이브스 아웃>을 클리셰로 가득한 관습적인 영화로 치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오히려 이 영화는 활용된 클리셰들이 깨지면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재미를 보는 맛이 있는데, 이는 라이언 존슨 감독의 특기이기도 하다. 우선 영화의 공간인 대저택의 경우, cctv가 설치되어 있는 등 19세기 혹은 20세기로 되돌아 간 듯한 인상과 괴리감을 주는 설정이 눈에 띈다.


배우를 활용하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특히 랜섬 역의 크리스 에반스라는 스타를 가지고 관객들과 수싸움을 벌이는 대목이 흥미롭다. 크리스 에반스는 '캡틴 아메리카'를 통해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배우이며 그렇기에 그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초반부에 그를 직접적으로 등장시키지 않은 채 그에 대한 간접적인 정보들만 제시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화는 랜섬이라는 인물이 진짜 범인일지 아니면 마르타를 돕는 선역인지에 대한 관객들의 판단을 헷갈리게 만들면서 서스펜스를 유지한다. 만약 크리스 에반스가 아니었다면 큰 효과가 없었을 트릭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어떤 사건인지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사건의 전말을 전부 알려주는 영화의 스토리텔링이야말로 작중 가장 큰 클리셰 비틀기로 볼 수 있다. 영화는 초중반부에 사건의 전말을 대부분 밝힌다. 그러면서도 서로 다른 시간과 인물의 시점에서 사건을 재구성하는 편집과 마르타가 절대 거짓말을 못한다는 설정을 활용해 일말의 여지를 남겨둔다. 그리고 영화는 이를 붙들고 명백해 보이는 사실이 숨기고 있는 마지막 진실, '도넛의 구멍'을 찾는 데 열중한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블랑의 추리보다도 마르타와 트롬비 가족 일원들의 심리를 묘사하는데 더 많은 공을 들인다. 진실을 마지막까지 숨겨둔 채 알려진 사실들에 대처하는 인간군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마르타와 월트가 대면하는 장면이 가장 대표적인 예시다. 이 장면에서 마르타가 자책감, 불안함, 의아함, 두려움에 휩싸인 반면, 월트는 그와 그의 가족들이 지닌 욕망과 이익을 위해서 선의를 가볍게 무시하는 추한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두 인물의 극적인 대비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선량함이 지니는 힘이라는 주제와도 직결되는 장면이며, <나이브스 아웃> 속 클리셰 비틀기가 단순한 쾌감과 반전만을 위한 트릭이 아니라는 점도 보여준다.



4. 또한 <나이브스 아웃>은 단순히 잘 만든 추리극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날카로운 메시지를 이면에 담고 있기도 하다. 작중 블랑은 이렇게 말한다. "물증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기도 한다." <나이브스 아웃>도 마찬가지다. 표면적으로는 권선징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서 영화는 최근 몇 년 사이의 미국 내 인종주의, 배타주의, 고립주의에 비수를 꽂고 있다.


마르타를 도와주는 척 배신했던 랜섬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타고난 권리와 재산, 선조들의 집을 그냥 넘길 줄 알았냐고. 하지만 블랑은 이 저택은 80년대에 할런이 파키스탄인 재벌에게서 구입한 것에 불과하다며 그 주장의 모순을 지적하고 비웃는다. 물론 이 장면은 단순히 트롬비 가족들의 추한 욕망과 비인간적인 태도를 꼬집는 장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장면은 미국 내 배타성과 폐쇄성에 대한 비판을 담은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민자들이 만든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단지 먼저 왔다는 이유로 이민자들이 다른 이민자들을 반대하고, 특히 그저 다른 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알려는 노력조차 전무한 채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 현 추세를 비판하는 것이다. 이민자들에 대해 트롬비 가족이 백인 중심적인 대화를 나누는 장면, 할런의 유산이 마르타에게 상속되자 서로 싸우던 트롬비 가족들이 재빨리 단결하여 마르타가 이민자이고 그녀의 어머니는 불법 체류자라는 점을 공격하는 것, 영화 종반부에 뒤바뀐 마르타와 트롬비 가족의 처지를 고려하면 그 함의가 더욱 분명해진다. 그렇기에 <나이브스 아웃>은 추리극의 탈을 쓴 한 편의 풍자극이기도 하다.



5. 추리극은 흔히 체스처럼 수싸움이 치열한 게임에 비유되기도 한다. 마지막까지 범인의 정체를 알 수 없게 만들려는 작가와 주어진 단서를 가지고 그 답을 찾으려는 독자(관객)들의 싸움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나이브스 아웃>은 관객이 감독을 이기는 것이 매우 어려운 추리 영화다. 왜냐하면 감독의 의도로부터 관객들이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치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를 보고 나면 라이언 존슨 감독의 연출 능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는 머그컵의 문구를 활용해 수미상관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또한 진짜 칼과 소품용 칼에 대한 대사처럼 영화의 모든 순간을 복선으로 활용하고, 그 복선들을 결말에서 거의 완벽하게 회수한다. 이처럼 잘 짜인 이야기 안에서 클리셰와 클리셰 비틀기가 자연스럽게 섞이고, 심지어 가장 웃기고 통쾌한 순간 묵직한 주제의식의 무게가 비수처럼 꽂힌다. 그러니 <나이브스 아웃>은 감독이 이길 수밖에 없는, 그의 의도가 완벽에 가깝게 구현된 게임과도 같은 장르 영화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현재의 문제를 과거의 문법에 담아낸, 명백하게 뛰어난 장르 영화


매거진의 이전글 <버즈 오브 프레이>, 결국 '할리 퀸'만 남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