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게 냉정하고 타오른다
1. 영화를 고르는 여러 기준 중 하나는 영화감독이다. 특정 감독의 작품들은 서로 다른 장르와 시간대의 영화라 할지라도 공통점이 있다. 예를 들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롱 테이크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스토리텔링의 중심으로 삼는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교차편집을 적극 활용해 영화를 지적 유희로 만들어내며, 스토리텔링의 중심에 부성애를 놓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같은 감독의 작품을 관람하면 같은 주제가 스크린에서 구현되는 서로 다른 방식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감독론적 시점에서 <퍼스트맨>은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만든 <위플래쉬>, <라라랜드>의 연장선상에 있다. 세 작품들은 모두 '꿈과 희생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만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앞 선 두 작품은 인물들의 감정을 표출하는데 비해, <퍼스트맨>은 철저히 숨기는 작품이다.
2. 셔젤 감독은 <위플래시>와 <라라랜드>에서 인물들의 심리를 몸짓, 음악, 대사, 춤을 통해 스크린에 마음껏 구현해냈다. 하지만 <퍼스트맨>은 아니다. 작중 '꿈'을 상징하는 라이언 고슬링의 닐 암스트롱은 기본적으로 대사가 거의 없다. 그리고 그는 철저히 혼자 남아 있는 인물이다. 대사도 없고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 있지 않으니, 닐의 감정은 직접적으로 영화에서 드러나지가 않는다. 심지어 카메라는 배우의 얼굴이 아닌 눈을 클로즈업한다. 눈은 순간적인 감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닐의 내면세계를 표현한다. 이는 짧은 쇼트로 표현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니다. 그렇기에 자연히 쇼트의 길이가 길어지고 영화의 호흡도 느려질 수밖에 없다.
우주와 우주비행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도 <퍼스트맨>의 성격이 드러난다. 철저히 우주선 내부만을 보여주고, 닐의 시선을 따라서 우주선 창문으로 보이는 우주만을 보여준다. 또 달의 도착한 그가 달을 바라보는 장면도 닐의 1인칭 시점에서 진행된다. 이 모든 것은 닐 암스트롱의 초조하고, 불안하고, 트라우마에 걸린 그의 모습을 가장 효과적으로 환기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시종일관 차가운 닐이기에 역설적으로 순간 표출되는 그의 감정은 더욱 강렬하다. 첫째 딸인 카렌을 잃고 오열하는 씬, 동료들을 죽음을 듣고 담담한 표정이지만 손으로는 유리잔을 부숴버리는 씬, 지구로의 귀환 후에 아내와 손만으로 대화하는 씬 등은 조명과 연출만으로 영화의 감정선을 고조시키는 훌륭한 쇼트와 씬들이다. 이처럼 셔젤 감독은 역사적인 (동시에 다분히 개인적인) 임무를 어깨에 짊어진 한 개인의 무거운 어깨를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3. 암스트롱에 이어 <퍼스트맨>이 조명하는 이들은 그의 가족들이다. 달 착륙이라는 임무로 인해 가족들은 가정 내에서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거의 할 수 없었다. 극 중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아주 짧은 단 몇 개의 쇼트들이다. 누나인 카렌이 죽었을 때만 해도 닐에게 놀아달라고 하던 큰 아들은, 시간이 흐른 후에는 먼저 밖에 나가서 놀아도 되냐고 묻는다. 가족이라는 범위 내에서 아버지인 닐의 비중이 매우 줄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렇게 달 착륙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무게에 짓눌린 개인과 가정에 이어 <퍼스트맨>은 그 배경이 된 미국 사회도 놓치지 않는다. 셔젤 감독은 달 착륙 프로젝트를 인종문제와 경제적 문제로 반대하는 이들과 이데올로기 싸움을 이유로 지지하던 이들의 갈등을 당시 방송 장면과 노래들을 삽입해 제시한다. 이렇듯 개인, 가족, 사회의 아픔과 희생을 바탕에 두기에, 아폴로 11호가 발사되는 장면은 단순히 감정이 벅차오르는 장면이 아닌 모두의 희생이 좋은 결과로 도출되기를 바라는 희망의 장면으로 격상된다. 곧 셔젤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꿈과 희생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인 것이다.
4. <퍼스트맨>은 이처럼 꼼꼼한 묘사와, 느린 호흡, 객관적인 태도와 절제된 감정표현으로 인해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여지도 있다. 즉 대중성이 부족한 편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영화 내에 몇 개의 쉼표가 있다는 점이다. 우선 클레어 포이가 연기한 자넷 암스트롱이 있다. 자넷은 평범한 삶을 꿈꾸며 미디어의 관심으로 인해 부담감, 불안함, 초조함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하는 인물이다. 남편인 닐과 비슷한 처지이지만 자넷은 표정, 제스처, 대사 등을 통해 작중 감정을 가장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인물이다. 관객들이 <퍼스트맨>을 보면서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인 셈이다.
셔젤 감독의 편집 역시 관객들의 숨통을 틔운다. 몇몇 시퀀스들에서 셔젤 감독은 매우 짧은 쇼트들의 연속으로 순간적으로 서스펜스를 끌어올리고, 극의 속도를 올리기도 한다. 시험 비행 후 기자회견 씬, 착륙선 테스트 씬 등이 그러하다. 그리고 이러한 전체적인 작품과 이질적인 장면들은 후반부를 위한 복선과 암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기도 한다.
5. <퍼스트맨>은 결국 달 착륙이라는 역사 최초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고통받고, 희생해야 했던 모든 이들을 아우르는 작품이다. 커리어를 위해 로맨스를 포기한 <라라랜드>의 미아와 세바스찬처럼, 닐과 그의 가족들, 당시 미국 사회 역시 그들에게 소중한 것들을 희생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달에서 닐이 크레이터에 떨어뜨린 카렌의 팔찌는, 물론 카렌을 향한 미안함과 속죄의 의미였겠지만 그와 동시에 달에 도착하기 위해 희생해야 했던 가족들, 동료들, 다른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토록 책임감이 크고 부담감이 무거웠기에 농담 하나 던질 여유가 닐에게 없었을 수도... 이렇기에 <퍼스트맨>은 <라라랜드>와 다른 영화가 아니다. 단지, 방법이 달랐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