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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oDAY May 14. 2019

모스크바의 신사

시공간이 빚어낸 마트로시카 인형

1. 에이모 토올스의 <모스크바의 신사>는 눈과 얼음의 나라 러시아의 제정 귀족인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백작'의 이야기로 한정된 공간인 모스크바의 '메트로폴 호텔'과 상대적인 시간이라는 독특한 배경을 지닌 작품이다. 이러한 시공간적 배경은 주인공인 로스토프 알렉산드르 백작이 러시아가 소비에트 혁명으로 혼란에 빠진 1920년대에 제정 러시아의 귀족이었다는 이유로 체포되나 혁명에 긍정적인 시를 발표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가택연금을 당하면서 시작된다.



2. <모스크바의 신사>의 공간적 배경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오로지 모스크바 시내에 위치한 메트로폴 호텔이다. 한정된 공간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들려는 찰나에 에이모 토올스는 아무리 작은 세계도 그 안에서 생기는 인연과 사건을 통해 거대한 우주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호텔이라는 공간은 필연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로스토프 백작은 다락방, 옥상, 미용실, 로비, 귀빈실, 레스토랑, 드레싱 룸과 지하 창고를 오가면서 숱한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만들어나간다.



3. 더욱 흥미로운 것은 더 이상 새로운 장소를 통해 로스토프 백작의 일상에 변화를 만들지 못할 때쯤에 등장하는 시간의 변화다. 사실 <모스크바의 신사>처럼 긴 시간을 다루는 소설이라면 모든 사건이 묘사되지 않고 중요한 일부만 작중에 등장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신사>는 시간의 배열이 독특하다. 하루, 이틀, 나흘, 1줄, 2주, 1달, 2달, 반년, 1년, 2년, 4년, 8년, 4년, 2년, 1년... 다시 하루로 이어지는 식이다.


그렇기에 로스토프 백작의 이야기는 지나간 시간만큼 그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예상하는 재미로 가득하다. 수십 년간의 고독을 어떻게 견뎠는지, 자신을 괴롭히면서도 지탱해주는 과거의 기억을 어떤 형태로 간직하는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과거의 잔재인 귀족이라는 정체성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활용했는지, 그리고 호텔 안에서 생긴 새로운 인연들, 만남들, 사람들과 어떤 삶을 누리고 있었는지.  


이에 더해 이러한 시간적 배경의 묘사는 우리가 체감하는 시간의 상대성을 효과적으로 펼쳐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도 세세한 시간 단위로 기억하지만 익숙해진 후 반복되는 일상은 그리 세밀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또 한 번 새로운 변화를 앞두면 우리 뇌는 시간의 흐름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저장해 내기도 한다. 에이모 토올스의 독특한 영감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시대를 살아가는 품격은 개인의 내면에서부터 나오기 마련이다.


4. 러시아라는 이국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한정된 배경을 설정해 역동의 시대 속 한 개인의 일상을 끈질기게 쫓아간 <모스크바의 신사>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결국 수십 년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시대 속에서 살아남은 알렉산드르 로스토프의 삶이다.


그는 제정 러시아의 귀족이었으나 소비에트 혁명 기간을 거쳐 범죄자가 되고 이후 웨이터, 개인교사,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의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힘과 능력을 이용해 변화의 파도에 맞서고,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을 내놓는 마트로시카 인형과 같은 삶,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백작의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거품 안에 갇히지 않고 끊임없이 다양함과 새로움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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