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 단열, 단절의 악순환
1. 사람들은 각자의 이름을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고 자신을 외부에 내보인다. 예술 작품의 제목 또한 마찬가지기에, 제목은 작품의 중심 소재와 주제를 함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SPLIT>은 적절한 제목을 지닌 영화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분리, 분열, 단절'의 테마가 영화 전반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SPLIT>은 국내에 한해 <23 아이덴티티>라는 제목으로 개봉했고, 개인적으로 이 제목은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왜냐하면 <23 아이덴티티>라는 제목으로 인해 영화의 전체적인 감흥을 온전히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2. <23 아이덴티티>의 주인공들은 사회에서 분리된 이들이다. 케이시는 또래 집단에 어울리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다. 케빈은 다중 인격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로 사회 부적응자다. 이 둘이 사회에서 외면받은 공통적인 원인은 학대다. 어린 시절 케이시는 삼촌으로부터 성폭력을, 케빈은 아동학대를 당했고 둘은 모두 사회로부터 멀어졌다. 이처럼 영화는 인물들의 설정에서부터 제목이 왜 <SPLIT>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분리/분열/단절'이라는 테마는 영화 스토리의 전반을 지배하기도 한다. 피해자가 되는 세 명의 아이들은 초반에는 같은 방에 갇히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결국 제각각 다른 공간에 갇히게 된다. 이는 케빈의 인격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의 여러 인격들은 서로가 서로를 인지할지언정 철저히 나뉘어서 존재한다. 작품 후반부에서는 케이시가 자신처럼 학대당하고, 사회로부터 멀어진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 케빈은 케이시와 동질감을 느끼면서 그녀를 공격하지 않는다. 이는 영화 내내 지속된 '분리/분열/단절'이라는 테마를 반대로 멋지게 활용해낸 전개다.
<23 아이덴티티>는 편집도 같은 테마를 공유한다. 케이시의 과거 사연은 플래시백을 통해 여러 차례 나눠서 제시된다. '케빈'이라는 본래 인격의 등장과'비스트'라는 24번째 인격의 등장 역시 '패거리'를 비롯한 나머지 인격들의 분할된 이야기를 통해 천천히 암시, 예고된다. 이렇게 분할적으로 편집한 결과 이 영화는 결말에 이르기까지 명확한 것이 하나도 없고, 관객들의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다. 이렇듯 '분리/분열/단절'이라는 테마는 심리스릴러라는 장르 본연의 특성인 불안감과 서스펜스를 극도로 고조시키며, <SPLIT>은 영화의 주제와 테마를 영상으로 멋지게 구현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23 아이덴티티>라는 번제는 영화 내적으로는 단지 케빈의 캐릭터를 강조할 뿐 이러한 영화의 테마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문제를 초래한다. 또한 영화 외적으로도 문제를 유발한다. 왜냐하면 샤말란 감독은 이 작품을 <언브레이커블>, <스플릿>, <글래스>로 이어지는 3부작의 시리즈로 제작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들은 제목에서부터 그 연관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23 아이덴티티>라는 제목은 이마저도 전달하지 못하며 시리즈의 연결고리로서도 역할을 하지 못한다.
3. 이러한 번제의 문제도 있지만, <23 아이덴티티>는 영화 내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특히 이 영화의 전개는 상당히 불친절한 면이 있다. 비스트의 등장을 기점으로 스릴러에서 히어로물로 영화의 장르가 급격히 전환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 충분치 않다. 또 엔딩 장면 역시 전작인 <언브레이커블>을 보지 않으면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이 부분은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는 지점이다.
하지만 이 점을 제외하면, <23 아이덴티티>는 장르의 특성을 잘 살린 수작이다. 샤말란 감독은 인물들의 시선을 화면에 그대로 반영해 당황스러움과 불안감 등 인물들의 감정을 극대화시킨다. 누워 있는 케이시의 시점으로 화면이 90도 회전하거나, 플레처 박사의 흐릿한 시각을 반영해 블러 처리된 영상, 폐쇄된 공간에서 밖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시선으로 케빈을 비추는 카메라 등이 그 예시이다.
또한 배우들의 활용도 뛰어나다. 24개의 인격을 연기한 제임스 맥어보이의 연기는 물론 뛰어나지만, 그의 연기를 잘 활용한 연출도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인격이 달라질 때 얼굴 클로즈업을 통해 제임스 맥어보이의 표정을 최대한으로 살려내는 식이다. 또한 아냐 테일러 조이라는 배우 특유의 분위기를 살려 호러/스릴러 장르의 느낌을 배가시킨 것도 마찬가지다. 아냐 테일러 조이는 유독 호러 영화에 많이 캐스팅되는 배우인데(<글래스>에도 캐스팅된 것은 물론, <엑스맨: 뉴 뮤턴트>에도 캐스팅된 상태다), 그만큼 그녀가 가진 독특한 마스크를 적절히 활용한 것이다.
4. 이 영화는 장르 영화의 재미를 넘어선 고민거리를 던지기도 한다. 시제로 <23 아이덴티티>는 사회에서 분리된 개인들이 겪는 악순환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케빈은 말할 필요도 없고, 성폭력의 피해자이면서 여전히 삼촌과 지내며 사회적으로도 외톨이가 되어버린 케이시 또한 결말부에서 사회를 향해 조용한 적대감을 표출한다. 범죄를 통해 강하게 드러내느냐, 스스로 사회와 척을 지며 소극적으로 드러내느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상처 입고 사회에서 분리되어가는 개인, 그러한 개인들이 가득한 사회에서 또 고통을 입는 개인들... 이러한 악순환 속에서 우리는 이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무엇을 해 주고 있는지, <23 아이덴티티>는 생각한 것보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그래서일까, 유독 국내 번제가 너무나도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