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시대를 반영한다는 단순한 명제의 도전적인 증명
1. <킹스맨>은 지극히 영국적인 작품이다. 킹스맨의 어원, 구성원의 출신, 007을 의식한 설정과 대사들이 그러하다. 또 아서 왕 전설을 차용한 점이나, 양복점이라는 공간 역시 영국이라는 영화의 국가정체성을 공고히 한다. 그럼에도 킹스맨은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고, 2편까지 나온 현재에는 하나의 유니버스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그 이유가 뭘까? 외면적으로 <킹스맨>은 영국적인 작품일지 몰라도, 내적으로는 누구나 공감 가능한 보편적인 시대상을 담아낸 영화이기 때문이다.
2. 킹스맨의 주인공은 해리와 에그시다. 해리는 전형적인 영국 귀족 신사이고, 에그시는 직업조차 없는 하급 계층 청년이다. 양복과 스트리트 패션의 도상적인 측면에서부터 명확한 둘의 대조적인 관계는 <킹스맨>의 핵심이다.
<킹스맨>이라는 영화를 영국 안에 한정시키면, 해리는 고급스러운 전통의 영국을 상징한다. 007의 나라, 신사의 나라, 왕(여와)과 귀족의 나라, 멋진 브리티시 악센트의 나라... 해리가 속한 킹스맨은 영국 그 자체다. 그렇다면 에그시는 영국이 아닐까? 아니, 에그시도 영국 그 자체다. 하지만 그의 영국은 브렌트우드 체제 이후 힘을 잃은 영국, 맨체스터 폭동으로 대변되는 불만에 가득 찬 청년들이 사는 영국, 브렉시트와 스코틀랜드 문제로 사회적 신뢰가 깨진 영국이다. 해리가 에그시를 킹스맨에 추천한 것은 어찌 보면 영국인들의 판타지가 투영될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영국이라는 국가가 힘을 되찾기를 바라는. 그러면서도 에그시가 전통적인 방식이 아닌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킹스맨에 합류하는 모습은 과거의 방식만으로는 그 판타지가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영국인들 스스로가 먼저 인지하고 인지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셈이다.
이러한 변화의 필요성은 영화의 다른 장면들에서도 드러난다. 정장을 차려입고 맥도널드를 먹는 발렌타인, 007을 대놓고 패러디한 장면들은(본드-본드걸 관계를 비틀어버린 에그시-틸다의 관계 등) 현대적인 감각을 갖춘 영국의 등장을 희망하는 영국인의 판타지가 투영된 장면들이다.
3. 하지만 해리와 에그시의 관계가 영국이라는 국가만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이 둘의 관계는 더 큰 범위에서 보면 계층 간의 갈등을 상징하기도 한다. 킹스맨과 해리로 대변되는 부와 권력을 지배하고 대물림하는 상위계층과 에그시로 대변되는 사회적 약자들로 이루어진 하위 계층의 부딪힘인 셈이다. 이를 대변하는 장면이 "Manner Maketh Man"이라는 명대사가 등장하는 술집에서의 대화 장면이다. 해리는 에그시가 가진 재능이 있지만 노력하지 않아서 지금 모습에 머물러있다고 일갈한다. 반면에 에그시는 지금 사회에서는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이미 시작점이 달라서 성공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 실제로 작중 킹스맨은 귀족 자제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술집에서의 대화는 세계적인 문제의 빈부격차와 계층 간 갈등을 담아낸 장면으로 이후에 나오는 액션씬만큼이나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두 측면에서 본 <킹스맨>의 주제의식은 스파이 영화의 변화를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다. 007 시리즈, 미션 임파서블, 본 시리즈를 거치면서 스파이 영화는 단순한 액션과 서스펜스는 물론 개인의 정체성과 국가관의 충돌, 갈등, 속죄와 성찰을 다루며 세계의 변화를 반영해왔는데 <킹스맨> 역시 주제와 분위기는 다를지언정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후속작인 <킹스맨: 골든 서클>이 1편만큼 열광적인 호응을 일으키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더 화려해진 액션과 패러디, 자극적인 빌런과 소재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주제의식이 희미해진 결과다.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였던 에그시는 2편에서는 모든 것을 갖춘 엘리트 스파이가 됐고, 해리는 비중이나 분량이 모두 1편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해리를 선망하고 에그시에 공감하던 관객들이 애정을 줄 캐릭터가 사라져 버리고, 이 둘의 관계가 약해졌다는 것은 곧 <킹스맨>의 주제의식이 약화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 결과가 <킹스맨: 골든 서클>이다.
4. 이처럼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의식에도 불구하고 <킹스맨>은 상업영화로서의 매력 또한 놓치지 않았다. <킹스맨>은 진중한 주제를 순수한 영화적 쾌감으로 멋지게 감싸 안는 데 성공한 것이다. 또 한 번 호흡을 맞춘 헨리 잭맨의 멋진 음악과 훌륭한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매튜 본 감독의 연출과 편집이다.
<킹스맨>은 전체적으로 상당히 잔인한 영화다. 하지만 매튜 본 감독은 윤리와 비윤리의 경계선에서 줄 타는 다소 과장된 연출과 편집을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잔인함보다 시각적 쾌감을 더 강하게 느끼도록 한다. 교회에서 롱테이크로 펼쳐지는 액션씬이나 사람 머리가 폭발해 폭죽놀이가 되는 장면들이 대표적이다. 이는 원작 코믹스를 바탕으로 한 만화적 정체성과 실사영화로서의 정체성을 묘하게 혼합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매튜 본 감독은 전작인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서도 엑스맨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만화책 컷처럼 스크린에 칸을 나눠 제시하는 식으로 편집한 바 있는데, 이러한 편집과 연출은 코믹스와 영화라는 매체를 본 감독이 완벽히 이해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다.
따라서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는 영화의 뿌리인 코믹스와 국가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영화 장르의 시대적 변화와 현재 사회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감독의 과감한 연출과 편집을 거쳐 스크린에 구현된, 상업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에 가까운 영화다. 그리고 앞으로 개봉할 다음 <킹스맨> 시리즈들은 <골든 서클>의 아쉬움을 딛고 <시크릿 에이전트>의 충격적인 쾌감을 다시 한번 재현해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