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껏 개인적으로 많은 도시를 가봤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파리처럼 그 특유의 분위기에 흠뻑 취한 도시도 없었다. 파리, 예술과 와인의 도시! 바로 그 파리에서의 첫날, 에펠탑을 바라보며 와인과 함께한 저녁 식사와 센 강을 따라 걷던 순간, 그리고 많은 미술관에서 경탄하던 기억들은 평생토록 간직할 추억이었다.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지닌 모든 이들이 얼굴 가득 미소 지을 수밖에 없는 환상적인 영화다.
2. 1920년대 파리를 배경으로 하는 <미드나잇 인 파리>는 시간과 공간적 배경 간에 묘한 충돌을 일으키면서 영화의 배경을 설정하는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배경 설정만으로도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몰입감과 개연성을 갖추는 데 성공하기 때문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의 가장 큰 특징은 1920년대 파리의 예술과 예술가들을 향한 애정이 넘쳐난다. 모네, 마네, 드가, 피카소, 로댕,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터너, 콜 포터 등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이 영화 속에 등장하거나 언급된다. 이러한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대한 사전 지식은 영화 감상 시 만족도에 큰 영향을 주는데, 사전 지식이 있다면 1시간 반이 지나간 줄도 모를 만큼 몰입해 황홀해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감독의 불친절에 불평을 토해낼 것이다. 동시에 예술가들은 스토리 전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예를 들어 영화 결말부에서 헤밍웨이라는 인물의 이름과 존재감은 스토리의 개연성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에 더해 파리라는 공간적 배경은 주인공들의 감정선에 공감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파리는 사랑으로 가득하고 변화라는 꿈을 불어넣는 도시이기 때문인데, 사실 이러한 분위기의 조성은 파리라는 공간이 지니는 일반적인 이미지에 조금 기대고 있기도 하다. 다른 장소라면 어울리지 않을, 급작스럽다고 느껴질 만한 전개도 파리에서 진행되기에 설득력을 지니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의 오프닝은 파리의 명소들과 거리를 한 컷씩 카메라가 비추는 씬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는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설정 씬이다. 이처럼 <미드나잇 인 파리>는 1920년대라는 시간적 배경과 파리라는 공간적 배경의 사전 정보가 절묘한 조응 혹은 묘한 충돌을 일으키는 와중에, 당시의 예술과 장소의 분위기가 화려하게 빛나는 영화다.
3. 영화의 배경 설정은 <미드나잇 인 파리>의 소재, 그리고 메시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모든 사람이 가질법한, 그래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감정인 '향수 Nostalgia'에 대해 이야기한다. 향수라는 감정을 동경을 바탕으로 한다.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따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그 대상을 그리워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향수라는 감정은 언제나 과거를 목적어로 갖고 너무나도 주관적인, 그래서 언제나 상대적인 감정이라는 특징이 있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이러한 감정을 시간여행을 통해 멋지게 시각화한다.
작중 주인공인 '길'은 1920년대의 예술가들을 동경하며 항상 그 시대를 그리워한다. 그는 골동품을 사랑하고 그가 집필 중인 소설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는 시간여행을 통해 그가 사랑한 예술가들을 만나며 흥분하고, 현실의 약혼자를 버려두고 그가 사랑한 시대를 상징하는 여인인 아드리아나와 사랑에 빠진다(그녀는 영화 상으로는 피카소의 그림 <아드리아나>의 모델 이이도 했다) 하지만 그가 과거를 동경하든 그녀 역시 과거 르네상스 시대를 동경하기에 이 둘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좋은 시대라 해도 현실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아픔과 괴로움이 존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스토리는 우리가 그리워하고 꿈꾸는 시기가 누군가에게는 그저 현실일 뿐이며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황금시대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지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향수'라는 감정을 일깨워 준다.
그렇다고 해서 <미드나잇 인 파리>가 작중 현재 시간대 대부분의 인물처럼 과거를 동경하고 과거에 대한 향수를 지니는 것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영화의 존재 자체로 과거의 향수가 현재를 이해하는 힘이 되고 새로움을 만드는 발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길'도 마찬가지다. 그는 비록 아드리아나와 이별의 아픔을 겪지만 그가 그토록 사랑한 예술가들 덕분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명확히 이해하게 되며, 새로운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었다. 비 오는 파리를 함께 걷는, 콜 포터를 사랑하는 두 남녀의 모습이 아름다운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전형적인 우디 앨런 영화이기도 하다. 어떤 면으로는 관습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어울리지 않는 배경을 지닌 현재의 연인들이 특정한 사건을 통해 극적으로 운명적인 사랑을 찾게 되는 스토리는 우디 앨런의 트레이드 마크다. 하지만 관객들은 스토리를 예상하 수 있음에도 영화를 끝까지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감독 본인의 경험을 투영하는 것 같은 영화의 감정과 소재, 음악과 배경, 그리고 대사가 어우러진 멋진 연출이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릴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4. 이처럼 <미드나잇 인 파리>는 향수라는 인간의 감정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 아름다운 배경, 흥미로운 스토리, 그리고 이를 모두 아우르는 연출로 가득한 멋진 영화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파리에 있던 단 며칠의 향수가 뇌리를 가득 채웠고, 잠깐이라도 도시의 정취를 느끼고 싶어 당장 비행기에 오르고 싶은 충동을 참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미드나잇 인 파리> 속 표현처럼, 파리만큼 놀라운 도시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돼요. 그럼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상상속의 황금시대. 현재란 그런거예요. 늘 불만스럽죠. 삶이 원래 그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