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 오브 카드>를 <빅 쇼트>로 포장하다
1. <바이스>는 부시. W 행정부 시절 '실질적 대통령'이라는 평을 받던(실제로도 그러했고) '딕 체니' 부통령을 조명하는 영화로, 그의 정치적 행보뿐만 아니라 성장기 및 가족들과의 스토리 등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를 통해 영화 자체를 풍자로 전환시키면서 수반될 수 있는 논쟁을(예를 들어 <변호인>이 개봉했을 때 같은) 피해 간다. 실제로 <바이스>는 일반적 범주에서 벗어난 내용과 형식이 일품인 영화다. 미국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한다면 <하우스 오브 카드>의 스토리를 <빅 쇼트> 스타일로 풀어낸다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미국 민주주의와 정치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포착하면서도 이를 풀어내는 방식은 신선하다 못해 충격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실제로 감독과 제작진이 <빅 쇼트>와 동일하다).
2. 내용적인 측면에서 <바이스>는 논쟁적인 사건들을 굳이 우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종일관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누가 보더라도 미국 민주당 시각에서 이루어지는 스토리텔링은 지난 30여 년간 미국 정치계를 주름잡았던 모든 공화당 정치인들과 그들의 정책들을 모조리 깐다. 그리고 이 살벌한 비판의 한가운데에는 당연히(?) 주인공인 딕 체니가 있다. 쉽게 말해서 <바이스>는 워터게이트, 이라크 전쟁, 9.11 테러, 관타나모 고문 등 미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종횡무진 누비며 '딕 체니'가 얼마나 무능하고 권력욕으로 가득하며 비인간적인지를 낱낱이 밝히는 영화다. 이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난다.
영화의 제목인 <바이스 Vice>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 단어다. 하나는 부차적이라는 의미를 더해주는 '부-'라는 뜻이다. 이럴 경우에는 '부통령 Vice President'처럼 활용이 된다. 하지만 Vice는 '악'을 뜻하는 단어로 '선과 악 Vice and Virtue'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이처럼 이중적인 의미의 제목으로 인해 우리는 두 가지 시각으로 영화를 관람할 수 있다. 전자의 시각에서 이 영화는 딕 체니 '부통령'의 전기 영화에 불과할 따름이다. 단지 독특할 뿐. 하지만 후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바이스>는 우리가 무엇을 '악'이라 느끼는지에 관한 영화다.
영화 속 '딕 체니'는 누가 뭐라 해도 악인이다. 그의 악한 면모는 개인적/정치적 양측에서 드러난다. 개인적으로는 함께한 정치적 동지를 팔아먹고, 권력을 위해서라면 끝내 가족까지 포기하며, 스스로의 생명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생명은 가차 없이 무시하는 등 인간성이 결여된 인물이다. 정치적으로는 부와 권력을 위해서 공동체가 합의한 헌법과 시스템을 소수의견을 통해 입맛에 맞게 해석하기도 하며, 그 과정에서 타인의 인권을 탄압하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절차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삼권분립과 같은 모든 체계를 무시하는 것이며, 그런 그를 보면서 우리는 딕 체니를 악마와 동일시하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의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삶의 토양이자 터전이기 때문이다.
민주사회에서 권력자들은 권력을 단지 위임받은 이들에 불과하다.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서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들은 시민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들의 권한을 대신 사용해야지 자의적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바이스>이 배경인 미국에서는 이러한 민주주의의 진리가 부정당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미국 민주주의는 그 이미지와 다르게 제도적으로 본질적인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와 상원 의원 선거는 간선제이기에 시민들의 뜻이 온전히 전달되기 어려우며 왜곡될 가능성도 많고, 사실 이러한 문제는 대의제를 선택한 모든 민주국가들에서 발생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바이스>는 이러한 민주주의 함정을 폭로하고, 시민들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3. 스토리의 무게감을 덜기 위해서였을까. <바이스>는 스토리의 시간적 순서, 영화의 화법과 형식 등 상업적 영화의 프레임에서 벗어난다. 관찰자 포지션에 위치한 화자는 극의 반전과 캐릭터의 드러내는 역할을 하며, 영화와 관객 사이의 4차원의 벽은 관객들에게 직접 말을 거는 인물들과 영화 자체를 조롱하는 쿠키 영상을 덕분에 산산조각 나버린다. 영화 내적으로도 시간과 인과관계의 순서에 변화를 주는 편집이 보이기도 하며 엔딩 크레디트, 셰익스피어와 마블 코믹스를 넘나드는 '딕 체니 까기'는 <바이스>를 (민주당 시점의) 스탠드업 코미디로 보이게 만든다. 사실 같은 감독과 제작진이 만든 <빅 쇼트> 역시 전통적인 영화적 형식을 파괴한 작품이지만, <바이스>는 단언컨대 <빅 쇼트>로부터 100보 정도 앞서 나간 영화다(게리 올드만이 '처칠'을 연기한 <다키스트 아워> 생각하면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을 수 있다는 뜻이다).
4. 미국 정치, 문화, 역사에 대한 사전 정보나 관심의 유무에 따라 <바이스>는 호불호가 강하게 나뉠 수밖에 없다. 부시 행정부의 여러 삽질이나 미국 정치에 대한 정보가 있을 경우 비하인드 스토리를 접하는 신선한 재미를 느낄 수 있지만 아닐 경우 그저 지루한 정치영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새로운 연출기법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관습화 된 할리우드 영화를 즐기는 관객들에게는 이마저도 낯설고 불편할 것이다. 이처럼 힘들고 어렵고 낯설고 불편한 영화에 편안함을 제공하는 것은 바로 배우들, 그리고 그들이 연기한 캐릭터다.
'딕 체니'는 영화에서 최소한의 인간미는 있으나 권력욕에 사로잡힌 인물로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나름의 내적 갈등과 고민을 지닌 인물로, 영화 막바지 인터뷰 씬에서 알 수 있듯 분장마저 가려버리는 크리스천 베일의 연기력을 통해 스크린에 입체적으로 재현된다. 그의 아내인 '린 체니'는 에이미 아담스의 안정적인 연기에 힘입어 딕의 인생을 바꾼 최고의 조언자이자 지지자, 그리고 능동적인 행위의 주체로서 자신만의 개성을 어필하는 데 성공한다. 체니 부부 외에도 샘 록웰이 맡은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스티브 카렐이 연기한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신 스틸러로서의 역할을 완벽히 해낸다.
이에 더해 지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분장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뛰어난 배우들의 분장은 그들의 연기를 더욱 빛나게 하며 인물들을 개성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다. 이러한 연기, 연출, 편집, 메시지 등 영화의 모든 면들을 종합해서 봤을 때, 솔직히 말해, <바이스>는 (어느 의미로든) 너무 진보적인 영화이고 그래서 마음에 쏙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