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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oDAY Apr 03. 2019

그린 북

약자들 간의 잔잔한 우정

1. 최근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는 작품들을 쏟아내고 있다. 2월에 열린 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이러한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이번 시상식 작품상에 노미네이트 된 8편의 영화 중 <바이스>와 <스타 이즈 본>을 제외한 나머지 6편이 모두 흑인, 여성, 동성애자 등 사회/정치적 약자들을 다룬 작품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해 단상에 올라온 <그린 북> 배우들과 스태프들


정치적 올바름을 수용한 영화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억압당하는 계급의 인물들이 역경을 어떻게 뚫어내는지, 그들이 이후에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가 영화의 주요 내용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소수인종 특례입학제도가 역차별 논란에 휩싸이듯, 이러한 작품들도 다른 정치 사회적 약자들을 무시하거나 오히려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피터 패럴리 감독의 <그린 북>은 이러한 역차별 논란까지도 보듬어내 아카데미 작품상까지 수상한 영화다.  



2. <그린 북>의 장르는 기본적으로 로드 무비와 버디 무비다. 따라서 영화의 재미가 만들어지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다. 두 명의 주인공이 여행을 하면서 함께 겪는 여러 '사건들'과 그들이 상호 간에 경험하는 '갈등과 협력의 에피소드들'이다. 따라서 <그린 북>은 여러 사건에 휘말리는 두 주인공이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얼마나 입체적으로 묘사되느냐에 따라 필연적으로 그 재미가 좌우될 수밖에 없다. 두 캐릭터의 갈등과 협력, 조화와 이해를 통해 극의 완급조절이 이루어지며 작품의 메시지도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연 배우인 비고 모텐슨과 마허샬라 알리는 생동감 넘치는 연기를 통해 캐릭터들을 온전히 살려내며 본인들의 역할을 다한다.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으로 하층계급이자 다혈질인 '토니 발레롱가'와 교양 넘치는 흑인 뮤지션 '돈 셜리'라는, 존재만으로도 영화의 주제의식이 함축되는 개성적인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3. 하지만 배우가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 하더라도 훌륭한 각본이 없다면 훌륭한 연기가 나올 수 없다. 바꿔 말하면 <그린 북>의 작가들은 그만큼 영리한 각본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사실 <그린 북>은 초반부만 해도 뻔한 장르 영화로 보일 수 있다. 백인 주인공이 흑인 주인공을 도와주는, 즉 위험에 처한 돈을 토니가 구해주는 클리셰가 거듭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영화의 첫인상은 곧 180도로 바뀌게 된다.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여러 사건을 통해 돈과 토니는 서로 간의 가치관 차이를 깨닫고, 싸우고, 대화도 하면서 사회적 현실을 이해하며 둘의 관계가 변하기 때문이다. 초반부와 달리 돈이 토니를 곤경에서 구해내기도 하며 토니와 돈이 서로의 선택을 지지해주기도 하는 등 둘의 관계는 누군가가 의존해야 하는 수직관계가 아닌 동등한 수평관계로 변화하며, 이는 <그린 북>의 시나리오가 훌륭한 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계 변화의 상징이 바로 음식이다. 초반부만 해도 토니와 돈은 극단을 달리는 음식 취향을 보여준다. 하지만 두 달 간의 여행을 통해 둘은 점점 같은, 비슷한 음식을 먹게 된다. 예를 들며 켄터키에서 먹는 켄터키 치킨이라든가...  음식뿐만이 아니다. 말하거나 글을 쓸 때 사용하는 어휘들, 즐겨 듣는 음악 취향 등 사소한 습관 하나하나가 서로를 닮아가는 디테일을 <그린 북>은 놓치지 않는다. 전혀 다른 타인들이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며 함께하는 삶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셔레이드로서 음식을 각본과 연출적인 측면에서 모두 잡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4. <그린 북>은 인종차별을 소재로 한 영화다. 하지만 <그린 북>은 단순한 흑인 대 백인의 이분법적 인종차별 구도에서 벗어나 넓고 심층적 차원에서의 사회적 차별을 다룬다. 작중 토니는 백인 남성이지만 이탈리아 출신의 이민자이자 경제적 하층 계층에 속한 인물로 미국 주류 사회에서 배척받는 존재다. 돈은 흑인으로 인종차별을 당하는 존재이나, 토니의 시각에서 보면 엘리트 계층에 속하는 인물일 뿐이다. 하지만 엘리트 교육을 받은 돈은 그렇기에 흑인의 정체성 등, 주류 계층의 정체성도 지니지 못한 방랑자에 불과하며 이는 작중 돈이 굳이 미국 남부에서 연주회 투어를 도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그린 북>은 일반적인 흑인을 향한 인종차별뿐만 아니라 백인 사이에서도 벌어지는 계급 간의 차별을 꼬집어내며, 현재 미국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아카데미에서 <그린 북>을 유독 고평가 한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미국 대선에서 디트로이트 지역의 저소득층 백인들이 트럼프를 적극 지지한 것이 그의 당선에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서로 다른 종류의 차별은 이 차별에 맞서는 두 인물의 태도에 차이점이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돈은 흑인을 향한 백인의 차별이 개인적으로 해결하기 힘들며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을 알기에 즉각적인 저항보다는 인내하려는 태도를 보인다(개인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반면 토니는 스스로도 백인이기에 자신을 향한 차별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즉각적으로 응수하곤 한다. 그러니 둘이 서로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이와 같은 인종차별과 인종 내의 차별, 서로 다른 계층과 인종에 속한 이들 간의 가치관 대립과 유대감 형성까지. <그린 북>의 '그린 북'은 단순히  흑인들만을 위한 미국 남부지방 여행책자가 아니다.*



E (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모든 사람이 초록색 식탁에 둘러앉아 즐겁게 켄터키 치킨을 뜯는 그날까지



*'그린 북'은 미국 남부 지방을 여행하는 흑인들을 위해 1930년대에 만들어진 흑인들이 출입 가능한 숙박시설과 식당을 알려주는 책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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