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룩 업> &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
지난 4월, 흥미로운 뉴스가 있었습니다. 과학자 멸종 저항 단체 '과학자반란(Scientists Rebellion)'에 속한 과학자들이 기후 연구를 파업하고 대규모 시위대에 합류했다는 소식이었죠. 과학자반란에는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에 참여했던 과학자나 나사(NASA) 소속 기후과학자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들 과학자는 기후 과학이 기후 위기를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밝혀냈는데 정치가 이에 응답하지 않는다면서 시위를 열었죠.
이 뉴스가 시위를 연 주체가 다름 아닌 과학자이기 때문에 흥미롭습니다. 보통 과학자들은 어떤 명제를 100% 확신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반론의 가능성을 열어두죠. 이는 원칙일 뿐만 아니라 과학자로서 체득하는 지식이기도 합니다. 달리 말해 항상 약간의 가능성을 남겨두는 이들이 시위에 나설 정도로 기후 위기 상황이 좋지 않다는 뜻이겠죠.
지난 2021년 8월에도 과학자 반란은 IPCC 보고서 초안을 유출한 바 있습니다. IPCC 정례 보고서는 유엔 주재로 전 세계 과학자들이 기후 위기와 그 대처에 대한 과학적 평가를 모색한 문서죠. 각국 이해관계자가 보고서 속 문장을 확인하고 투표로 공개 여부를 결정합니다. 과학자 반란은 보고서를 유출하면서 IPCC가 실제 기후 위기에 의한 위협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과학적인 결론'만 내놓는 대신 여러 나라의 정치적 이해를 개입시켰기 때문이죠. 급진적인 온실가스 감축 정책이 포함되지 않거나, 선진국들이 배출하는 온실가스의 양과 비중에 관한 언급이 축소되어서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흥미로운 뉴스는 어딘가 낯설지 않습니다. 확신에 가득 찬 과학자, 연구 결과를 거부하고 은폐하는 정치인, 거리로 나선 과학자와 시시각각 다가오는 지구 멸망의 순간까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돈 룩 업>을 쏙 빼닮았기 때문입니다. 더 슬픈 것은 현실에서 마주한 문제와 영화 속 인류가 멸종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 놀라울 만큼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천문학과 대학원생 '케이트(제니퍼 로렌스)'와 담당 교수 '랜들 민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박사는 한 혜성이 100% 확률로 지구와 직접 충돌할 것이라는 경악스러운 사실을 발견한다. 이에 두 사람은 지구를 구하기 위해 대통령 '올리언(메릴 스트립)'과 그녀의 아들이자 비서실장 '제이슨(조나 힐)'의 집무실 방문부터 '브리(케이트 블란쳇)'와 '잭(타일러 페리)'이 진행하는 인기 토크쇼 출연에 이르기까지 불편한 진실을 전달하고 납득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대통령과 거대 IT 기업의 회장 '이셔웰(마크 라이런스)'를 포함한 모든 이들은 각자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진실을 곡해하며 극심한 갈등을 빚고, 그 사이 지구와 인류는 하루하루 종말에 가까워진다.
<돈 룩 업>의 겉모습은 애덤 맥케이 감독의 전작인 <빅쇼트>와 <바이스 중 후자와 매우 유사합니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미국 부통령(vice president)이었던 딕 체니를 '악(vice)'으로 규정하고 신랄하게 비꼬았던 <바이스(Vice)>처럼 <돈 룩 업>도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가득하죠. 올리언 대통령이 표를 따라 혜성 대비책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것, 검증된 능력이 전혀 없는 아들 제이슨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하는 것은 트럼프의 포퓰리즘 정책과 가족 인사에 대한 풍자입니다. 올리언이 혜성의 접근을 부정하는 것은 지구온난화의 영향력과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파력을 평가절하했던 트럼프의 실책을 연상시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돈 룩 업>을 정치 풍자 코미디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영화의 정치 비판은 보이는 것과는 결이 조금 다르기 때문이죠. <돈 룩 업>은 단순히 한 개인의 실정을 비난하거나 좌우 진영 논리에 빠지는 대신 더욱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합니다. 영화가 진정으로 문제시하는 것은 전반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이 부재한 사회 현실에 가깝습니다. 특히 기능에 따라 분화된 사회적 시스템 간에 가교가 부재한 현실을 날카롭게 찌르고 있죠.
분업화된 시스템의 함정
현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각자 고유한 기능을 전담하는 시스템의 공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중세 시기만 하더라도 사회의 모든 기능은 종교와 도덕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정치와 법, 경제, 문화에 이르는 모든 영역에서 신성하지 못하거나 악마적이라고 여겨지는 대상은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현대 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종교나 도덕은 부정선거, 주가 조작, 논문 표절, 스포츠 선수의 도핑처럼 정치, 경제, 법의 시스템이 온전히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만 존재감을 드러내죠. 그렇지 않은 경우 각각의 시스템은 철저히 자신의 영역 내에서만 작동해야 합니다. 정치권력의 크기와 경제적 이윤이 (규범적으로는) 직접 연관될 수는 없으며, 돈이 많다고 재판에서 무조건 이기는 것도 아니고, 정치적 이유로 예술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면 안 되는 이유죠.
문제는 독립된 시스템들이 각자 영역 내의 목표 달성에만 몰두할 뿐, 전체 사회 구조의 유지라는 공통된 목표를 향해 협력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현재 경제나 과학기술의 영역에서는 암호화폐의 등장과 같은 새로운 혁신이 발생하고, 학문이나 문화의 영역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의가 진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 시스템 간의 소통이 부재한 결과, 법과 정치의 시스템은 그 변화를 적절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더 나아가 빠르게 발전한 시스템이 뒤처진 시스템의 기능을 침범하기도 하죠.
그 결과 현실에서는 자본이 사회적으로 유일한 진리가 되거나, 정책 설계에 있어서 전문가의 의견보다도 정치적 유불리가 중시되는 비상식적인 일들이 벌어집니다. 사회 전체의 구조가 무너지는 것이죠. <돈 룩 업>은 바로 이 대목을 풍자하여 환기하려 합니다.
정치, 과학, 미디어가 단절된 <돈 룩 업>의 세계
실제로 <돈 룩 업>에는 사회적 시스템 간 소통 부재와 그로 인한 문제를 묘사한 장면이 가득합니다. 혜성을 처음으로 발견한 게이트와 민디 박사가 올리언 대통령에게 그 사실을 전달하는 장면이 대표적이죠. 민디 박사는 천문학적 용어를 동원해 혜성이 지구에 충돌할 것이라는 끔찍한 사실을 전달합니다. 반면에 해당 언어를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 전무한 백악관 대통령실의 분위기는 그저 평온할 뿐이죠. 참다못한 케이트가 지구와 혜성이 부딪히면 모든 생명체가 죽을 것이라고 가장 쉬운 말로 경고해도 대통령과 비서실장은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습니다. 과학적 발견은 정치의 영역 안에서 철저히 득표를 위한 수단일 뿐이죠. 실질적으로 정치인과 과학자 간의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시스템들이 과학자들과 소통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대통령의 반응에 실망한 케이트와 민디 박사는 차선책을 택합니다. 언론을 통해 진실을 알리고 여론을 움직이려 하죠. 그러나 토크쇼에서는 그들의 발견을 그저 수많은 가십 중 하나로 취급합니다. 정작 토크쇼에서 건져낸 것은 랜들의 외모에 주목하는 인기에 불과했죠. 아무도 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세태에 경악한 케이트를 조롱하는 각종 밈도 있고요. 신문사도 자체적인 팩트 체크를 이유로 그들의 발견을 기사화하지 않습니다.
이에 더해 과학과 경제, 정치와 시민사회 사이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의 부재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혜성 충돌마저도 경제적 효용으로 계산하는 거대 IT 기업의 회장 이셔웰은 민디 박사를 비롯한 수많은 과학자와 지속해서 갈등을 빚습니다. 정부가 좀처럼 혜성 관련 정책 변화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자 시민들 사이에서는 의심이 자라나고, 이는 폭동으로 이어지죠.
과학의 영역 안에서도 세부 분과별로 소통이 되지 않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케이트의 발견을 두고 나사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것이 대표적이죠. 또 이셔웰이 혜성을 파괴하고 혜성에 존재하는 광물 자원을 활용할 대책으로 제시한 신기술이 동료평가(peer review)도 거치지 않은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진정한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습니다. 심지어 종말이 임박한 순간 올리언 대통령은 아들인 제이슨 비서실장과도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죠. 이 장면은 지금까지 열거한 모든 문제점을 한 장면에 함축합니다.
이는 케이트 블란쳇이나 티모시 샬라메처럼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스타들이 제각각 언론인, 정치인, 과학자와 같은 조연으로 캐스팅된 것과도 연관이 있어 보이죠. 여러 스타 배우의 존재 덕분에 특정 캐릭터에게 쏠릴 시선은 분산됩니다. 그 사이 영화는 친숙한 스타의 얼굴을 통해 정치, 언론, 과학, 경제와 같은 서로 다른 시스템 간의 단절된 관계성을 직관적으로 제시하고 메시지를 강조할 수 있죠.
과연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은 가능할까?
덕분에 영화 후반부에 종교적 심성이 돋보이는 장면은 유달리 인상적입니다. 민디 박사의 가족과 친구는 모두 모여 마지막으로 밥을 먹습니다. 이들 중에는 종교를 믿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죠. 그런데도 그 순간 이들은 케이트의 남자 친구인 '율(티모시 샬라메)'의 도움을 받아 신에게 기도합니다.
이는 기도하는 방법도 모를 만큼 탈종교화된 현대 사회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그와 동시에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를 개선하지 않으면 현대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모든 체계가 실패하고 끝내 종교에 기댈 수밖에 없는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대목이죠. 즉, 지구 멸망의 원인은 혜성이나 지구온난화 같은 자연재해나 특정한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막을 기회를 허공에 날린 현대사회의 체계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체계를 만든 게 인간이라는 점에서는 인간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고요.
한편 과학자반란의 구성원들은 시위 외의 활동도 이어가는 중입니다. 지난 8월 1일에는 케임브리지대 진화생물학자, 난징대 생명과학자 등 국제 연구진이 '기후 엔드게임 : 재앙적 기후변화 시나리오 탐구'라는 제목의 논문을 학술지 PNAS를 통해 발표하기도 했죠.
이 논문에서 연구진은 기후 위기가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증거가 충분하다고 주장합니다. 구에 인간이 살 수 있도록 돌이킬 방법이 없는 '엔드게임'에 진입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죠. 특히 온실가스 배출량 증가를 비롯해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등으로 인해 미래에 나타날 영향이 불확실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위안이 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불확실성은 더 안 좋은 상황으로 이어질 개연성이자 위협에 가깝다는 것이죠. 인간은 지구의 작용을 완전히 예측하거나 파악할 수 없을 테니까요. 이처럼 지구라는 행위자의 의도나 반응을 알 수 없다면, 중요해지는 건 결국 인간의 대응입니다.
특히 불확실성과 관련된 메시지는 지구온난화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지구를 비롯해 인간과 소통하는 모든 비인간 행위자들과의 관계에도 해당하는 메시지죠. 그 행위자에는 공룡과 메뚜기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공룡들의 터전이었던 이슬라 누블라 섬이 파괴되고, 섬을 벗어나 세상 밖에 자리 잡은 공룡들. 세계가 혼란에 휩싸인 가운데 '오웬(크리스 프랫)'과 '클레어(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는 공룡들을 보살피고, '메이지 록우드(이사벨라 써먼)'를 지키기 위해 작은 오두막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복제 인간 연구를 진행하려는 기업 '바이오신'에 의해 메이지가 납치당하고, 오웬과 클레어는 메이지를 구하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한편, 미국 서부에 나타나 농가들을 휩쓸고 다니는 거대한 메뚜기 떼를 조사하던 '엘리 새틀러(로라 던)'는 오래된 친구 '앨런 그랜트(샘 닐)'과 함께 메뚜기들이 바이오신의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졌음을 깨닫는다. 이에 엘리와 앨런은 그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과거의 동료인 '이안 말콤(제프 골드브럼)'의 도움을 받아 공룡들이 모여 있는 바이오신 소유의 보호구역으로 향한다.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은 1993년에 개봉한 <쥬라기 공원>을 시작으로 29년간 이어진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쥬라기 월드> 삼부작의 주인공인 크리스 프랫과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부터 <쥬라기 공원> 삼부작의 주인공인 로라 던, 제프 골드브럼, 샘 닐까지 한 자리에 모여 피날레를 장식하죠. 물론 공룡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전편에서 이슬라 누블라를 탈출해 북미 대륙에 상륙한 공룡들은 이제 어디에나 있습니다. 바다에서도, 눈 내리는 산맥에서도, 소들이 뛰어놀던 평원에서도, 심지어 암시장에서도 나타나죠.
독특한 건 언제 어디서나 공룡을 만날 수 있는 세상이 배경인데 정작 영화가 공룡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세상을 위기에 몰아넣은 것은 온갖 곳으로 퍼져나간 공룡이 아니라 유전자 조작 메뚜기 떼입니다. 영화의 메인 플롯도 유전자 조작 메뚜기를 개발한 기업인 바이오신을 고발하는 내용이죠. 이처럼 공룡이라는 소재에 갇히지 않은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 전개는 긴 시리즈에서 반복되던 메시지를 탈피해 새로운 화두를 던지며 자신만의 개성을 이룹니다.
<쥬라기 공원> 시리즈의 주제와 메시지
<쥬라기 공원> 삼부작과 <쥬라기 월드> 1편의 주제는 분명했습니다. 인간의 기술적 진보에 대한 경고였죠. 공룡이라는 환상 속에는 윤리 없이 유전공학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거대 기업들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었습니다. 돈과 명예를 좇아 경쟁적으로 발전할 뿐 자기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현대 과학에 경고를 날리기도 했고요. 인간이 자연을 제어한다는 것은 혼돈 효과에 의해 불가능하다는 통찰도 담겨 있었죠. 이는 오리지널 삼부작에서 쥬라기 공원이 실패하고, 성공적으로 보였던 쥬라기 월드도 폐장한 공통의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편인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부터 시리즈는 기본적인 뼈대만 간직한 채 조금씩 주제를 확장하기 시작했죠. 화산 폭발로 파괴된 이슬라 누불라 섬에서 공룡들을 구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오웬과 클레어의 이야기를 담은 전편은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된 바 있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교감이 한 축이고, 다른 생명의 흥망성쇠에 인간의 개입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과학윤리적 질문이 다른 한 축이었죠.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콜린 트레보로우 감독의 인터뷰에서는 시리즈의 대주제 위에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려 한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슬라 누블라 섬에서 데리고 나온 공룡들을 더 큰 세상 속에 풀어놓게 된 거예요. 그것의 결과를 탐험해 볼 수 있는 정말 멋진 기회였습니다.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은 우리가 자연계의 힘을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영화입니다"라고 영화의 주제를 설명합니다. 특히 '자연계의 힘'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하죠. 이는 <쥬라기 월드>가 단순히 공룡과 인간의 공존을 다루는 데서 멈추지 않겠다는 말로 들립니다. 인간과 공룡은 물론 거대한 메뚜기 같은 다른 존재들도 포함된 하나의 세계, 곧 쥬라기 '월드' 그 자체로 시선을 돌리겠다는 선언이죠.
세계는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망으로 이루어진다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의 변화에서는 미국의 정치 철학자인 제인 베넷의 그림자가 짙게 느껴집니다. 정치생태학자인 그녀는 자연과 물질도 인간처럼 세계의 변화에 반응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오직 인간만이 의지와 목적을 갖고 주변에 존재하는 환경, 사물, 비인간 생명체를 이용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베넷에 따르면 인간이 아닌 행위자에게도 인간처럼 의지와 목적을 가진 채 행동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또 그들이 인간 행위의 방향성을 바꿀 수도 있죠. 인간은 식물, 동물, 무생물, 자연의 집합체로 이루어진 네트워크에 속해 있으므로 인간의 모든 행위도 매 순간 사물과 결합해 효과를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문화가 자연과 뒤얽혀 반응한 결과이듯이, 인간의 의도 역시 거대한 비인간 행위자인 자연과 환경과의 만남 안에서 실현되어야 하죠.
유전자 조작 메뚜기의 등장은 이러한 정치생태학적 견해를 압축시킨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중 바이오신은 유전자 조작으로 만든 곡물 종자들을 배포함과 동시에 거대한 메뚜기 떼를 개발해 식량 공급망을 교란합니다. 자신들이 전 세계의 식량 산업을 지배하기 위해서죠. 하지만 바이오신의 계획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메뚜기들이 인간의 계획과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음모가 세상에 드러날 것을 우려한 바이오신의 CEO '도지슨(캠벨 스콧)'은 선수를 칩니다.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실험실에서 키우고 있던 메뚜기 떼를 전부 소각 처분하죠. 하지만 메뚜기들이 실험을 통해 파악한 것보다 생명력이 더 질겼습니다. 그들은 불붙은 상태로 연구실을 탈출해 공룡이 거주하는 숲 전체에 불을 퍼뜨리며 사건을 은폐하려던 도지슨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상황을 초래합니다.
이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비인간 행위자의 의도와 반응과 만난 후에야 비로소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즉, 이전까지의 시리즈가 다른 생명체의 세계에 인간이 주체로서 어떻게 개입할지에 주목했다면,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은 이제 인간과 비인간의 네트워크가 움직이는 방식 그 자체를 들여다보죠.
인간과 공룡이 함께 구하는 세상
특히 영화는 서로 복잡하게 연결된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 정동(affect)하는 모습을 감정적으로 그려냅니다. 그 중심에는 오웬과 벨로시랩터 '블루'가 있죠. <쥬라기 월드> 시리즈에서 오웬과 블루의 관계는 항상 특별했습니다. 오웬은 항상 블루를 조련할 방법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저 그의 선택과 행위를 존중할 뿐이라고요. 오웬과 블루는 동등한 주체로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죠. 이는 인간과 공룡의 관계를 넘어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비록 그 말을 제대로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요. 실제로 이전 두 편의 영화를 보면 오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피를 본 인물들이 늘 등장합니다.
이들의 관계는 세상을 바꾸는 결정적 기제입니다. 바이오신이 실험을 위해 새끼인 베타를 납치하자 블루는 극도로 난폭해지죠. 그런 블루에게 마찬가지로 메이지를 납치당한 오웬은 베타를 함께 구해오겠다고 약속합니다. 메이지와 베타를 구하는 여정 중 오웬은 예상치 못하게 유전자 조작 메뚜기 사태를 접하게 되고, 그 결과 바이오신의 악행은 온 세상에 공개되죠. 블루와 오웬은 각각 가족을 되찾고, 메이지와 베타는 오웬과 블루와 같은 유대감을 형성합니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던 공룡들도 바이오신 소유였던 땅에 터를 잡게 되죠.
이렇게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은 공룡에 국한되지 않는 상상력을 통해 자연계의 힘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단순히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연의 능동적인 반응에 따라 결과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고 이야기하죠. 영화 속에서는 인간과 공룡, 인간과 메뚜기, 더 나아가 인간과 지구의 상호작용이 다행히도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현실에서도 그럴 것이라는 보장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과학자들의 외침과 <쥬라기 월드>의 해피엔딩은 대비를 이루며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내죠. 과연 지구와 지구인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