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멀티버스를 꿈꿀까?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by KinoDAY

코로나 시국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실내에서의 삶입니다. 학교와 직장을 가기 조차 어려워지고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이 2년간 지속됐죠. 그 무료하고 답답한 삶을 달래기 위해서 수많은 챌린지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지금은 생각조차 잘 나지 않는 달고나 커피가 대표적이죠.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코로나 시국을 버티게 한 진짜 힘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가상의 공간입니다. 거창하게 메타버스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저 익숙한 우리의 공간이 전부 인터넷과 모바일 공간 안에 모여들었고, 이 변화가 앤데믹이 다가오는 시점에도 유효하다고 생각할 뿐이죠.


가장 대중적인 문화 관람이었던 영화관의 경우 이제 우리는 손안에 들어온 지 오래입니다. 그것도 넷플릭스, 웨이브, 쿠팡플레이, 디즈니+ 등 종류도 많습니다. 이제 최신 영화 혹은 큰 스크린이나 좋은 음향이 필요한 영화가 아니라면 굳이 집 밖으로 나설 이유가 없습니다. 영화관이 집 안에 있으니까요. 음식점도 마찬가지입니다. 배달앱은 이동하고 줄을 서는 수고를 없애버렸습니다. 강의실과 사무실도 노트북 화면으로 대체됐죠.


문제는 2년이라는 짧은 시간 사이에 풍덩 빠져버린 이 공간이 원래 우리가 발 딛고 살던 공간과는 많이 다르다는 데에서 기인합니다. 인터넷, 메타버스, 가상공간은 일단 명확한 제한이 없습니다. 그 결과 제한 없는 공간에서는 기존의 규범, 도덕, 인식이 모두 위협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차적인 문제로는 누가 누구인지 알기 어려운 공간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얼굴이나 실명 등 상대방을 특정할 수 있는 정보가 없어도 문제 되지 않는 공간이므로 이곳에서는 사실상 누구나 마스크를 쓰고 있는 셈이죠.


이러한 사회적, 개인적 변화를 영화감독과 작가들이 놓칠 리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변화에 민감한 사람들이니까요. 그 결과 점차 특정 소재가 회자되고 있죠. 바로 멀티버스입니다. 실제로 팬데믹 기간에 공개된 대표적인 멀티버스 영화인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과 <에브리씽 에브리원 올 앳 원스>는 모두 멀티버스를 인터넷 내지는 가상공간에 빗대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사는 우주가 아닌 또 다른 우주가 존재한다는 인식 때문에 이제 멀티버스는 마냥 허황된 공상이 아니죠.



<스파이더맨:노 웨이 홈> 거미 소년이 살아갈 익명의 삶

‘미스테리오’의 계략으로 인해 세상에 정체가 탄로 난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톰 홀랜드)’는 영웅으로 포장된 미스테리오를 죽인 살인자로 몰리면서 갑작스레 평범한 고등학생으로서의 일상을 잃어버린다. 문제는 본인뿐만 스파이더맨의 조력자로 알려진 여자친구 'MJ(젠데이아)'와 절친 '네드(제이콥 배덜런)'의 대학 진학까지 막힌 것. 이에 피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찾아가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임을 온 세상이 잊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실패한 닥터의 마법 때문에 뜻하지 않게 열린 멀티버스에서 피터가 스파이더맨이라는 사실을 아는 빌런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고, 불시착한 빌런의 처리를 두고 피터는 닥터 스트레인지와 충돌하면서 더 큰 위기 속으로 빠져든다.


MCU의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을 간략히 요약하면 스파이더맨이 피터 파커라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사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터의 얼굴이 뉴욕의 모든 전광판에 등장하는 오프닝이 작중 모든 사건의 직간접적 발단이기에 이름을 잃어버림으로써 상황을 타개하려는 것이죠. 실제로 익명성의 상실은 피터는 물론 가족과 친구들의 삶까지 망가뜨리죠. 닥터 스트레인지의 주문이 실패로 돌아간 후 나타난 빌런들이 공통으로 스파이더맨이 피터 파커라는 사실을 안다는 점도 이번 스파이더맨 영화의 콘셉트를 잘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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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성으로 이어지는 피터 파커와 현대인

이때 피터의 모습은 마치 현대인의 잔혹동화 같기도 합니다. 익명성은 현대 사회의 삶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피터에게 익명성은 뉴욕의 빌딩 사이를 웹(web) 스윙하며 스파이더맨으로서 활동할 기회이자 자신을 보호할 방패였습니다. 현대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익명성은 웹(web)을 통해 연결된 인터넷 공간을 활용할 기회이자 그 안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어 수단이죠. 그래서인지 익명성이라는 보호막을 잃은 피터가 무차별적인 비난의 표적이 된 것은 낯설지 않습니다. 이는 현실의 '신상 털기'와 유사할 뿐만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악몽이니까요.


같은 맥락에서 보면 영화의 주요 소재인 멀티버스와 빌런들, 그리고 삼파이더맨의 등장도 팬서비스 이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익명성은 본질적으로 무한한 해방감과 동시에 그 못지않은 비도덕성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SNS와 커뮤니티, 게임에 존재하는 수많은 익명의 '나'는 자유롭게 행동하는 만큼 수많은 갈등을 빚을 수 있죠. 갈등과 충돌은 때때로 인터넷 공간 밖의 현실 공간에 존재하는 '나'에게까지 실질적인 피해를 안기기도 합니다.


즉, MCU의 피터는 현실의 '나'이고, 스파이더맨이 존재하는 수많은 멀티버스는 익명의 '내'가 살아가는 수많은 공간이며, 피터가 스파이더맨임을 알고 찾아온 빌런들은 익명의 '내'가 만들어낸 충돌에 대한 메타포이죠. 닥터 스트레인지의 마법이라는 쉽고 매끄러운 해결 방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피터의 고민과 고난은 현실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므로 동화적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이죠. 즉, 피터 파커로서의 삶과 스파이더맨으로서의 삶을 모두 살려는 게 문제라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말은 피터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이름 간에 균형점을 찾지 못해 현실의 삶과 일상이 무너지는 모든 이들을 향한 지적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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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스파이더맨이 모여야만 했던 이유

결국 빌런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인 삼파이더맨이 등장해 현실 속에서의 해결 방안을 알려줘야 합니다. 서로 다르지만, 또 같은 존재로서 동질감을 느끼는 스파이더맨들은 공통의 경험을 토대로 위로와 격려, 그리고 조언을 건네며 트라우마의 극복을 돕습니다. 멀티버스를 넘나드는 스파이더맨 간의 연대는 인터넷 공간 속을 부유하던 서로 다른 '나', 수많은 부캐들과 본캐 사이의 만남과 일치로 이해할 수 있죠. 즉, 삶의 균형을 찾지 못한 뼈아픈 대가를 치러야 했던 피터가 또 다른 피터들을 만나 방황을 끝낼 힘을 얻은 데서 현실의 '나'도 배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익명으로서의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세상이라면 내적으로 단단해져서 삶의 주도권을 쥘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죠.


이때 삶의 주도권이 곧 책임감을 뜻한다는 점에서 '큰 힘에 따르는 큰 책임을 깨닫는' 스파이더맨의 성장 서사도 새롭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본래 고등학생에 불과한 피터 파커가 거미에게 물려 엄청난 근력과 특수한 능력을 지닌 영웅이 되는 것은 청소년기에 누구나 겪어야 하는 신체적 변화를 상징했습니다. 또 그러한 변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그 과정에서 아픔과 슬픔을 겪어야 하는 스파이더맨의 모습은 청소년에서 성인이 되어가는 우리 모두의 고단함이 함축되어 있었죠. 즉,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라는 이 유명한 대사는 슈퍼히어로가 되는 것 이전에 온전한 성인이자 개인이라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덕목을 정의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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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 의미의 스파이더맨

따라서 큰 힘과 큰 책임의 범주를 익명성이라는 맥락 안에서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한 명의 성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보다 현대적인 조건을 제시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 원래도 성장 영화였던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변화한 시대에 발맞추는 새로운 성장 서사로 탈바꿈하죠.


이에 더해 익명성에 따르는 책임감이라는 메시지는 빌런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스파이더맨의 도덕성과 선량함이 영화 내내 강조되는 이유와도 직결됩니다. 작중 팟캐스트 진행자 혹은 유튜버처럼 묘사된 JJJ의 방향 설정에 따라 많은 이들이 대중이라는 익명에 기대어 스파이더맨을 비난하듯이, 현실에서도 가짜 뉴스 유포와 사이버불링은 더욱더 만연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런 상황을 예방하고 고쳐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결국 익명으로 활동하는 개개인의 도덕성과 책임감에서 찾고자 하죠. 그래서 개개인의 선량함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행간을 담아낸 "누군가를 돕는 것은, 모두를 돕는 것이다(When you help someone, You help everyone)"라는 대사가 유달리 인상적입니다. 피터가 진정으로 친절한 이웃이자 익명의 히어로인 스파이더맨으로서 다시금 활동하는 원동력이 되어주기 때문이죠. 이처럼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익명성의 야누스적 얼굴에 대한 경계심, 그리고 결과에 책임질 줄 아는 개인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는 셈입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애증의 모녀에게 멀티버스가 필요했던 이유

미국에 이민 와 힘겹게 세탁소를 운영하던 중 국세청 조사에 시달리기 시작한 '이블린(양자경)'. 국세청에 제출할 수많은 관련 서류를 검토하던 그녀는 남편 '웨이먼드(케 후이 콴)'의 이혼 요구와 연애 중인 여자 친구를 인정해달라는 딸 '조이(스테파니 수)' 때문에 대혼란에 빠진다. 그때 이블린의 눈앞에서 멀티버스가 열리고, 알파 지구에서 온 알파 웨이먼드를 만난 그녀는 수많은 자신이 다른 우주를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알파 웨이먼드는 이블린에게 그녀가 무한한 다중 우주의 절대 악 조부 투파키에 대항할 유일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녀는 수많은 이블린 중 가장 최악의 선택만 한 이블린이기에 모든 멀티버스의 이블린으로부터 능력을 빌려 온다면 위기의 세상과 가족을 구할 수 있다는 것. 또 알파 지구의 이블린이 딸 조이에게 권위적으로 윽박지른 결과 조이가 흑화 해 조부 투파키가 되었으니, 이블린만이 조부 투파키를 막을 수 있다는 점도 알려준다. 이에 이블린은 멀티버스의 운명과 딸과의 관계를 모두 구하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참신한 소재라면 가만두지 않는 창작자들 덕분에 '멀티버스', 다중 우주 개념은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익숙한 소재를 선택하는 것과 그 소재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은 다른 일이죠. 멀티버스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연적으로 다양한 설정을 필요로 하는 다중 우주 개념은 마치 복어 요리와도 같죠.


하지만 다니엘 콴과 다니엘 쉐이너트, 두 명의 다니엘이 만든 액션 코미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원>)는 다릅니다. 시작부터 멀티버스 세계관을 숨기지 않으며 러닝타임 내에서 완벽하게 소화해내죠. 영화는 이블린이 책상에 가득 쌓인 서류를 뒤적이는 가운데, 거울에 비친 그녀를 담아내면서 시작됩니다. 두 명의 이블린을 함께 잡아주던 카메라는 이내 거울 안으로 빨려 들어가죠. 마치 지금 보이는 이블린 말고도 다른 이블린이 있다는 걸 암시하듯이. 거울을 활용한 도입부는 흥미롭게도 <에에원> 속 멀티버스만의 한 가지 특징을 암시합니다. 영화에는 다중 우주의 다양한 이블린이 등장하지만, 마치 거울 안에 갇혀 있듯 그들이 직접 만나는 장면은 없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시작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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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Everything)"이 있는 멀티버스, 인터넷

<에에원>의 멀티버스는 MCU를 비롯한 다른 영화의 멀티버스와는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멀티버스 영화는 우주 간의 경계가 없어져 '내'가 다른 '나'를 만나는 사건을 다루죠. 반면에 <에에원>의 멀티버스에서는 다른 우주의 '나'에게 있는 능력과 특징의 일부를 '내' 우주로 끌어올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블린은 필요한 순간마다 적재적소의 능력을 다른 우주의 이블린으로부터 빌려옵니다. 괴력의 '디어드리(제이미 리 커티스)'에게 쫓기자 쿵후 마스터 이블린의 격투 실력을 끌어오죠. 다수의 적과 싸워야 할 때는 피자집 아르바이트생 이블린의 광고판 돌리는 능력도 가져옵니다. 조부 투파키도 마찬가지죠. 불의의 사고로 모든 우주에 접속할 수 있게 된 그녀는 각종 기상천외한 능력을 끌어다 활용합니다.


흥미롭게도 <에에원>의 멀티버스는 낯설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필요한 순간 모든 것을 가져다 쓸 수 있는 멀티버스는 어딘가 친숙하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멀티버스는 인터넷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우리 주변에 존재하기 때문이죠. 현대인은 요리 레시피부터 지하철 배차 시각에 이르기까지 실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암기하거나 알지 못합니다. 대신 필요한 순간마다 인터넷에 접속해 가장 적절한 정보를 찾아내 활용할 줄 알죠.


이 맥락에서 보면 이블린과 조부 투파키의 갈등은 단지 멀티버스의 운명을 건 대결이 아닙니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서로 다른 세대의 갈등이죠. 멀티버스를 처음 접한 이블린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모습에서는 인터넷을 비롯해 스마트폰과 같은 모바일 세계를 처음 접한 기성세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멀티버스를 다루는 조부 투파키에게서는 태어날 때부터 인터넷을 서핑하던 새로운 세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다니엘은 <에에원>이 "세대 차이와 인터넷, 현대인들에게 만연한 잠재된 공포를 담고 있는 영화"라고 말합니다. 당장 전화번호를 모두 외우고 다니던 사람들의 눈에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치 다른 우주에서 온 사람을 보는 것처럼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죠.


누군가에게는 숨 쉬듯 당연한 삶의 방식이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들처럼 숨 쉬고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인해 정보가 넘쳐나고, 같은 시공간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시대에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일상이 아니죠.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행동만 골라 하는 철천지원수 간의 싸움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이블린이 동성애자인 조이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이자, 이블린이 막아야 하는 빌런 조부 투파키가 알파 지구의 조이인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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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버스 속 "모든 곳(에브리웨어)"의 의미

그렇다고 해서 <에에원>이 어머니, 부모님, 기성세대가 마주한 놀라움과 혼란에만 주목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는 멀티버스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울 조이의 내면을 장악한 공허함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죠. 그녀는 멀티버스 안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삶은 역으로 무의미합니다. 이는 SNS와 같은 인터넷 공간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곳에서 접하는 정보에 압도되거나 좌절하거나 공허함을 느끼는 일이 많아진 현대인의 모습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 결과 조부 투파키가 된 조이는 모든 것을 파괴할 블랙홀, 검은 베이글을 만듭니다. 세상을 휩쓸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파괴하기 위해서. 이렇게 조부 투파키는 이름만 다른 같은 공간에 사로잡혀 삶의 의미와 이유를 잃어버린 인물을 대변합니다.


조부 투파키의 캐릭터성은 <에에원>을 단순히 코미디와 액션으로 점철된 오락 영화가 아니라 예상치 못한 진중함까지 맛볼 수 있는 깊이감 있는 영화로 만들어 줍니다. 삶의 의미를 잃은 조부 투파키는 바위만 존재하는 우주에서 비로소 평온해집니다. 모든 것에게 개입하거나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우주의 고요함만이 소중한 것이죠.


이블린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녀는 모든 일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생생히 흘러가는 지금, 이 순간의 경험과 선택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고 뜻깊은 것이라고 말하죠. 또 당장 옆에 있는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설득합니다. 그래서 조부 투파키처럼 모든 멀티버스를 오갈 수 있는 능력을 얻은 이블린은 무위의 우주에서 딸을 끄집어 내려 하죠. 자신에게 권한 검은 베이글을 거절하고, 돌이 된 우주에서도 딸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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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블린과 조부 투파키의 논쟁은 두 다니엘이 <에에원>에 "가족 드라마용, 공상과학용, 철학용 답이 각각 따로 있다"는 말로 이어집니다. 철학적, 종교학적 사유가 함축되어 담겨 있기 때문이죠. 어찌 보면 이 모녀는 마치 해탈의 경지에 올라 모든 것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모녀의 갈등은 깨달은 자가 현실 세계를 무의미하다고 여겨 도덕적 규범을 무시하거나 외면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들도 자신처럼 해탈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며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주며 살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죠.


그래서 이블린이 끝까지 조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모성애이자 멀티버스의 붕괴를 막는 히어로의 자세이지만, 동시에 종교 철학적 선택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블린이 제3의 눈을 개안하는 것, 불교 미술 양식인 탱화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메인 포스터, 부처의 깨달은 마음을 상징하는 원불교의 일원상처럼 생긴 베이글의 존재는 오랜 시간 종교를 막론하고 이어진 논쟁을 다시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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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All at once)" 모든 것의 의미를 알게 된 사람의 마무리

이렇게 조부 투파키와 조이의 마음을 읽은 뒤 영화는 이블린의 시점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녀가 온갖 우주를 경험하며 단번에 깨달은 가르침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보여주죠. 에블린은 마침내 딸을 이해합니다. 그녀는 조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딸과 매번 싸웠죠.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문제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핵심은 자신과 딸의 세상이 같지 않으며 모녀가 서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이죠. 설령 딸의 세상이 두렵고 혼란스럽더라도, 발을 내디뎌 새로운 세상을 이해하고, 딸의 관점에서 딸의 고충에 공감하되 먼저 살아 본 이만이 알 수 있는 변치 않을 삶의 지혜를 일러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터득합니다. 이렇게 먼저 다가가서 위해서 그저 평범할 수 있었던 가족 드라마에는 멀티버스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에에원>은 두 다니엘의 말마따나 수많은 혼란 속에서 "가족에게 관심 갖는 법을 배우는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딜도와 애널 플러그, 장난감 눈깔 등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등장하는 B급 코미디 요소는 익숙함에 신선함을 더하는 양념일 뿐이죠. 영화는 줄곧 딸을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 엄마가 딸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를 마침내 깨달은 후 화해하는 익숙한 흐름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온갖 장르적 특징을 다 섞어 놓아 왁자지껄하고 정신없던 멀티버스는 결국 눈물 한 방울과 함께 가족 드라마로 귀결되죠.


이는 마지막 장면이 영화의 시작만큼이나 인상적인 이유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와 사정을 알게 된 이블린이지만, 그녀는 멀티버스 속으로 빠지지 않고 눈앞에 있는 세무국 직원 디어드리에게 주목합니다. 설명을 제대로 못 들었으니 한 번만 다시 말해달라면서 디어드리에게 관심을 쏟는다. 서류에 눈이 고정되어 있을 뿐 정작 가족이나 손님에게 제대로 신경 쓰지 않고 있던 오프닝과 비교하면 천지 차이 나는 변화입니다.


멀티버스가 이름만 다른 인터넷 공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상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다가가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작은 관심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죠. 결국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과 <에에원>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우주를 일부러 낯설게 만들어 잊고 지내던 삶의 명제를 상기시키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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