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커> & <천 명의 락커, 하나의 밴드>
코로나바이러스 그 자체가 던져준 충격이 서서히 진정될 무렵 우리는 다른 문제들을 새로이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에게 죽지 않을 수 있다는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되자, 코로나가 뒤바꿔 놓은 사회의 모습이 드디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변화한 사회상을 관통하는 키워드에 반론을 제기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죠. 바로 양극화 문제였습니다.
양극화는 곳곳에서 두드러졌습니다. 당장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의 경제적 여건과 삶의 질이 급속도로 차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진 공간의 면적도 생사의 문제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죠. 교육 현장에서도 양극화 그림자는 짙었습니다. 학교와 공교육의 최소한만 유지되는 상황에서 얼마나 교육에 더 열의가 있느냐, 그리고 그 열의를 뒷받침할 자본이 있느냐에 따라서 학습 격차 역시 코로나 이전보다 더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코로나와 직접적인 관련성은 옅을지 모르지만, 부동산값 상승이나 주식 광풍으로 인해 자본은 더 빠른 속도로 새끼 자본을 생산해냈죠.
이러한 양극화는 그 자체로도 문제였지만, 계층의 상층부와 하층부 간을 오가는 사다리나 엘리베이터의 작동을 어렵게 만들기에 그 심각성이 더 컸습니다. 애초에 시작점이 다르고, 아무리 노력해도 상층부의 사람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판단을 하는 순간 사람들은 일제히 포기할 것이기 때문이죠. 대입도, 취업도, 승진도요. 이동진 평론가의 표현을 비틀어 보자면 "상승과 하강으로 수직 이동의 희망을 끊어버린 비참한 계급 우화"가 우리의 사회상이 된 것이죠.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뭔가 거창하고 어려운 게 아닐 겁니다. 지나치게 벌어진 수직적인 구조의 격차를 조금이나마 줄이는 것, 각자도생할 것이 아니라 뭔가 공통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수평선을 그리는 일이 필요하겠죠. <브로커>와 <천 명의 락커, 하나의 밴드>는 바로 이 작업에 조금이나마 손을 보태는 그런 영화입니다.
거센 비가 내리는 어느 날 밤, ‘소영(이지은)'은 부산의 한 교회 베이비 박스 앞에 아기 '우성'을 내려놓고 떠난다. 때마침 베이비 박스 당직을 서던 ‘상현(송강호)'과 '동수(강동원)'는 소영이 남긴 쪽지에 아기의 이름이나 연락처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아기를 몰래 데려간다. 그러나 다음 날 빚에 시달리며 세탁소를 운영하는 상현이 불법 입양 브로커로서 길을 나서려는 찰나에, 예상치 못하게 엄마 소영이 아기를 되찾기 위해 돌아온다. 아기가 사라진 것을 안 소영이 경찰에 신고하려 하자 결국 자신들이 브로커임을 고백한 상현과 동수. 이에 소영은 우성이의 양부모를 찾는 여정에 동행하기로 한다. 한편 이 일련의 과정을 빠짐없이 관찰한 형사 '수진(배두나)'은 후배 ‘이형사(이주영)'와 함께 두 브로커를 현행범으로 잡기 위해 그들의 뒤를 쫓는다.
베이비 박스는 부모의 사정상 키울 수 없는 아기를 두고 가는 시설입니다. 한국에서는 2009년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 교회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현재 3곳의 종교시설에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사실 베이비 박스는 선한 목적과는 별개로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비판하는 쪽에서는 그 존재 자체가 아이를 유기하게 만든다고 말해왔고, 긍정하는 쪽에서는 아이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라고 말해왔죠. 그러나 양측 모두 부정하지 않는 점도 있습니다. 미혼 부모처럼 아이를 양육할 능력이 부족한 이들의 현실에 무관심한 한국 사회의 태도가 베이비 박스를 만들었다는 사실이죠.
그러다 보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가 베이비 박스 앞에서 시작되는 게 놀랍지는 않습니다. 이미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은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문제를 스크린에 투사하기로 유명하기 때문이죠.
수직적인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순
보통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은 서늘한 현실감을 유지한 채 해당 문제들을 파고들되, 섣불리 비판할 대상을 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문제를 겪는 당사자들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보면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죠. <브로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아 납치와 인신매매를 자행하는 브로커의 여정을 포착한 이 로드무비는 악행과 선의 사이에서 피어나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도록 만듭니다.
그 아이러니는 울진의 한 수산물 시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성이를 사려는 한 부부를 만난 소영, 동수, 상현. 부부는 우성이의 눈매나 눈썹을 살펴보면서 못생겼다며 외모를 품평하고, 친부의 직업이나 과거사를 따지기 시작합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는지 본래 약속보다 낮은 가격에, 그것도 할부로 우성이를 구매하겠다고 제안하는 부부. 이에 당황한 상현과 동수는 어떻게든 거래를 이어가기 위해 흥정을 해보지만, 아기를 비하한 부부에게 분노한 소영 덕분에 흥정은 이내 끝이 납니다.
이 장면은 수많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수산물 시장에서 생선 대신 아기가 거래 대상인 것이나, 아기를 파는 사람이 아기의 가치를 존중해 달라고 구매자의 부도덕함을 비난하는 것이나, 브로커에게 더 나은 구매자를 찾아달라는 소영의 모습은 무엇 하나 말이 되지 않죠. 아기를 팔려고 하는 순간 이미 도덕과 윤리와는 거리가 멀어진 듯한데, 그 안에서 또 도덕을 따지는 아이러니가 느껴집니다. 이처럼 악행을 저지르는데 정작 그 안에서는 선의가 느껴지는 모순은 러닝타임 동안 다양하게 변주되어 나타납니다.
이때 작중 모순은 서로 다른 세상의 논리가 충돌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직적인 세상 안에서 수평적인 관계가 부딪힌 결과죠. 우선 <브로커>의 세상은 <기생충>처럼 수직적으로 묘사됩니다. 카메라도 꾸준히 오르내리죠.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는 날에 소영은 아기를 버리기 위해 골목길을 올라가고, 수진과 이 형사는 그런 소영을 내려다봅니다. 보육원에서 같이 자란 친구를 만나 꿈을 이룰 수 있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헛헛한 인생 이야기를 한 동수는 보육원으로 향하는 긴 계단을 걸어 올라가죠.
인간관계도 수직적입니다. 조폭들에게 5,000만 원을 빚진 상현은 일원 중 하나인 태호 앞에서 쩔쩔매고, 후반부에는 그와 담판을 짓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내려가죠. 영화의 배경마저도 수직적인데, 부산답게 걸어 올라가기조차 벅찬 계단들이 잊을 법하면 등장합니다.
거듭 오르락내리락하는 동선, 시점, 관계는 세 인물이 사회적 시스템에서 가장 아래에 있고, 밀려난 이들이라는 공통점을 보여줍니다. 이는 영화에서 등장하는 여러 상자인 베이비 박스, 네모난 봉고차와 보육원의 모습으로도 나타나죠. 한 명만 들어갈 수 있는 베이비 박스가 상현, 소영, 동수 개개인의 삶이라면, 자동차는 가족을 상징하며, 보육원은 가족보다 조금 더 큰 사회 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육원 밖에는 사회라는 가장 큰 상자가 있고요.
이때 가장 큰 상자로부터 작은 상자로,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어려움은 결국 베이비 박스에 아이가 들어가게 만듭니다. 상현은 조폭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불법 브로커로 활동합니다. 보육원을 떠났지만 이렇다 할 희망을 찾지 못한 동수는 상현과 함께 봉고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밀매합니다. 가족을 이룰 수 있는 형편이 아닌 소영은 아기를 베이비 박스 앞에 내려놓죠. 이렇게 영화는 수직적인 세계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사연을 베이비 박스 안에 담습니다.
수평의 동행이 만든 가족
하지만 지상과 지하, 계단 위와 아래 사이에 냄새조차 넘어가서는 안 될 명확한 선이 있었던 <기생충>과는 달리 <브로커>는 비극으로 치닫지 않습니다. 상승과 하강의 세계가 극한으로 향하기 전에 동행이라는 이름의 수평축을 새로이 끼워넣기 때문이죠.
소영이 동수에게 자신이 꾸는 꿈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은 이 수평적 동행이 갖는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꿈속에서 비를 맞고 깨끗해지는 꿈을 꾼다는 소영은 꿈은 그저 꿈일 뿐이라고 자조합니다. 그러자 동수는 두 명이 쓸 수 있을 만큼 큰 우산이 있으면 되지 않겠냐고 반문하죠. 소영이 비를 맞으며 아이를 버렸던 것을 생각하면, 고물이 되어버린 봉고차 안에서 만난 이들과의 관계가 그 비를 피할 우산이 될 것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봉고차를 세차하던 중 다섯 일행이 비눗물을 뒤집어쓰고, 상현과 소영이 각자 쓰던 가명 대신 본명을 털어놓으며 깨끗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죠.
그리고 이 과정은 수직적인 세상과 대조되는 수평의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수평선이 보이는 동해안 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봉고차의 여정과 인천으로 향하는 KTX의 모습이 대표적이죠. 이러한 동행은 수직적인 세계에서 지친 이들, 특히 가족이 부재한 이들이 봉고차 안에서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 서로를 어루만지며 치유하는 과정이기에 특별합니다.
성매매 여성인 소영은 상현과 동수를 만나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 소속된 느낌을 새로이 깨닫습니다. 보육원 출신인 동수는 소영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에게 되돌아오지 않은 엄마의 심정을 마침내 이해하죠. 이혼 후 딸과 별거 중인 상현은 몰래 보육원을 빠져나와 봉고차에 탄 해진에게서 딸의 모습을 겹쳐 봅니다. 이는 오르내리는 대관람차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속마음을 털어놓는 장면이 유독 인상적인 이유이기도 하죠.
인간 찬가로 이어지는 봉고차
이때 영화는 유대감과 치유의 이야기를 인간 내면의 순수함과 도덕성에 대한 믿음으로 확장합니다. 사실 상현과 동수, 그리고 소영은 예기치 못하게 만난 사이죠. 좋은 일로 만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기를 유기하는 소영이나 그 아기를 팔아버리는 상현과 동수 모두 범죄자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악행 기저에 깔린 선의들의 만남에 초점을 맞춥니다. 아기를 베이비 박스에 두고 떠났지만 되돌아온 소영의 모성애, 아기를 잘 키워줄 적임자를 찾아주려 했다는 상현의 배려심, 버려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상처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동수의 동병상련은 한 데 모여 치유의 드라마를 써 내려가죠. 물론 자신들의 행적을 둘러대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부분적으로는 진심 가득한 선의가 만나 새 가족을 만들고 감동을 선사합니다.
이 감동은 엄마이자 딸로서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기로 결심한 소영이 모두에게 전하는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대사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달리 말해 이 대사는 악행을 저지른 이들의 내면에도 미처 꺼내지 못했을 선함이 존재한다고 말하죠. 그 선함 덕분에 모두의 생명이 특별하다는 인간 찬가가 들리기도 합니다. 실제로 영화의 끝에서 아들은 제각기 최선의 선택지를 고릅니다. 자신들이 마주해야 했던 인생과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하죠. 모든 책임을 아이 엄마에게 묻는 대신 그녀의 마지막 선택에도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흔들리는 편견과 고정관념
그렇다고 해서 <브로커>가 마냥 따뜻하고, 희망적이고, 밝은 태도만 견지하지는 않습니다.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답게 상현, 동수, 소영을 무조건 미화하거나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지도 않죠. 대신 영화는 이 아이러니를 관찰자의 시점에서, 즉 수진의 시점에서 따라가도록 권합니다. 그래서 영화는 수진의 관점에서 시작합니다. 수진이 소영을 내려다보는 구도는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소외된 이들을 보는 시점과 유사합니다. "버릴 거면 낳지를 말라"는 수진의 태도가 잘 녹아들어 있죠. 또 아기를 실은 상현의 봉고차를 수진이 조용히 쫓는 장면에서 영화의 타이틀이 등장하는 것도 관객이 쉽게 동일시할 수 있는 관찰자의 관점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수진의 관점과 태도가 뚜렷하기에 브로커 일행을 쫓는 그녀의 여정에는 더 깊은 드라마가 담길 수 있습니다. 단순한 관찰자였던 그녀도 이들의 동행을 따라가면서 혼란에 휩싸이기 때문이죠. 그녀의 냉철한 신념과 태도는 "낳고 나서 죽이는 게, 낳기 전에 죽이는 것보다 죄가 더 가볍냐"는 소영의 반박에 꺾이고 맙니다. 아이를 매매하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지만, 그들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간 편견과 제도의 공백도 그녀를 흔들죠. 멀쩡한 부부에게 입양되어야만 비로소 우성이가 행복할 거라는 그녀의 고정관념은 "아이를 가장 팔고 싶은 건 나였나 봐"라는 대사를 통해 고발됩니다.
이렇게 <브로커>는 베이비 박스가 필요 없는 세상을 원한다면 이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사람의 선의를 믿으며, 미리 단정 짓지 말자고 설득합니다. 정당화될 수는 없어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수직과 수평의 충돌 안에 담차오. 사회 제도에 대한 의문과 통념으로 자리 잡은 윤리적 판단에 대한 의심으로 악행과 선의의 딜레마를 장식합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수진과 동일한 입장에서 영화를 보다 보면 결말을 마주한 순간 메시지를 곱씹으며 자신을 성찰하는 깊은 상념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천 명의 이탈리안 뮤지션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의 목표는 푸 파이터스의 ‘Learn To Fly’를 함께 연주하고 그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천 명의 락커, 하나의 밴드'는 하나의 사운드를 위해 천 명이 합을 맞추는 과정을 담으면서도 연령, 직업 등이 전부 다른 개별 멤버들의 스토리도 놓치지 않고 조명한다. 누군가의 꿈이 현실이 되는 과정은 언제 봐도 즐거운 일. 음악을 사랑하고 연주 자체를 즐기는 이들의 거대한 에너지가 영화 곳곳을 빈틈없이 메운다.
흔히 록 음악은 반항의 도구이자 저항 정신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퀸과 같은 유명 밴드들도 말년에는 항상 스타덤과 반골 정신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했었죠. 지금도 Linkin Park, Maroon 5처럼 시대를 풍미한 밴드들은 언제나 록 정신을 잃고 평범한 팝 음악으로 지향점이 달라진 것이 아니냐는 우려와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또 록 음악은 연주자 혹은 밴드 하나하나의 개성이 유독 온전히 빛나야 하는 장르처럼도 인식됩니다. 관현악단처럼 대규모 연주자가 함께하는 록 음악은 쉽게 연상되지 않습니다. 일사불란함과 분업화는 록 음악에 기대하는 선율도 아니며 록 음악의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듯한 위화감마저 안기죠. 하지만 제17회 제천국제영화제의 국제경쟁부문 대상작이었던 <천 명의 락커, 하나의 밴드>는 록 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떨쳐내라고 이야기합니다.
천 개의 다양성이 만들어낸 하나의 하모니
평범한 지질학자였던 파비오는 어느 날 놀라운, 혹은 미친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천 명의 사람이 모여서 밴드 음악을 연주하면 어떨까?" "최애 밴드인 푸 파이터스의 'Learn to Fly'를 천 명이 함께 연주하고 노래하면 푸 파이터스가 이탈리아에 오지 않을까?" 같은 생각이죠. 그는 아이디어를 바로 실행에 옮깁니다. 최소한의 실력만 되면 통과할 수 있는 온라인 오디션을 통해 사람들을 모집한 후 체세나의 한 평원으로 그들을 불러 모으죠.
하지만 그들의 합주는 절대 쉽지 않습니다. 3~5인조 밴드만 하더라도 합주를 위해 숱한 피와 땀을 쏟아내야 하는데, 천 명의 합주이니 그 난이도는 상상 이상입니다. 그러나 엉망진창이었던 연주도 한때, 드럼을 시작으로 기타와 베이스, 보컬까지 마침내 합이 맞기 시작하면서 천 명으로 이루어진 밴드는 가슴과 배가 울리는 노래를 완성해 냅니다. 이들의 하모니는 그들이 생각한 것 이상의 나비효과까지 끌어냈죠. 유튜브에서의 뜨거운 반응을 시작으로 파비오의 아이돌이었던 푸 파이터스의 리더인 데이브 그롤과의 만남, 푸 파이터스의 체세나 콘서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합주는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천 명의 개인들이 외친 록 음악의 정체성
천 명의 락커들이 만들어낸 합주와 하모니의 힘은 연주의 규모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밴드에 참가한 개개인의 진심이 천 명의 합주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기 때문이죠. 천 명의 리허설을 보여주기 전에 카메라는 체세나까지 모여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려줍니다. 음악을 하면 생업을 유지할 수는 없을 것 같아 포기해야 했다는 선장부터 엔지니어, 프로그래머, 실업자, 초등학생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던 이들이 체세나의 지평선 위에서 함께 연주하죠.
그들은 자기 삶에서 음악이 갖는 의미를 털어놓습니다. 프로 뮤지션이 아닌 그들에게 음악은 돈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음악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기타와 드럼 스틱을 내려놓지도 않죠. 음악은 프로가 될 실력이 아니라는 매서운 현실을 일깨우지만, 또 그 현실을 견뎌낼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설령 어릴 적 꿈을 이루지는 못했더라도, 그 꿈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자칫 매서울 수 있는 현실의 풍파까지도 견뎌낼 수 있는 뿌리가 되어 줍니다.
덕분에 천 명의 락커가 만든 하모니는 단지 웅장한 선율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음악적인 측면을 넘어서서 하나의 밴드를 이루죠. 같은 꿈을 꾸었지만 포기했던 아픔을 공유하는 이들이기에 단 한 곡에 불과한 합주만으로도 서로를 위로하고 보듬으면서 순식간에 원 팀, 원 밴드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함께할 때 그들의 상승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죠.
환상이 아닌 현실의 힘이 되는 음악
영화의 시작과 끝을 보면 이들의 합주는 더욱 명징하게 대비를 이룹니다. 자신들의 아이돌을 콘서트장으로 불러오기 위해 외딴 평원에서 즐겁게 연주했던 이들. 그들은 푸 파이터스가 진짜로 이탈리아에서 콘서트를 열고, 자신들을 초대하고, 그 자리에서 ‘Learn To Fly'를 함께 노래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합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 그들은 이제 푸 파이터스의 자리를 대신합니다. 본인들이 콘서트의 주인공이 되어 콘서트장 한가운데에 서죠. 그들이 푸 파이터스의 연주에 열광했듯이, 자신들의 합주에 열광하는 관객들 사이에서 천 명으로 이루어진 밴드는 다시 뭉칩니다. 각자의 이유로 음악을 할 수 없거나 멀리 해야 했던 락커들은 이제 음악과 한 몸이 되고, 함께 연주하는 천 명과 하나 되죠. 콘서트장의 관객들은 물론 유튜브와 영화를 통해 자신들을 마주한 이들에게 들려줄 아름다운 하모니를 완성합니다.
영화의 첫 노래인 푸 파이터스의 'Learn To Fly'와 마지막 노래인 라몬즈의 'Blitzkrieg Bop' 가사를 살펴보면 천 명의 락커가 어떻게 음악을 통해 현실을 바꾸었는지를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음악으로 먹고살 수 없는 상황에서 막연하게나마 "현실로부터 자신을 구할 새로운 삶을 꿈꾸며 높이 날기를 꿈꾸던(Now, I'm lookin' to the sky to save me. Lookin' for a sign of life... Make my way back home when I learn to fly high)" 이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헤이 호, 이제 가자(Hey ho, let's go)"라는 구호를 외치며 "차가운 현실을 뚫고 진격해 나갈 수 있다는(They're going through a tight wind... The Blitzkrieg Bop) 자신감과 열정으로 가득합니다.
물론 두 작품의 메시지는 나이브합니다. 양극화나 계층 이동이 줄어드는 문제는 개개인들이 애를 쓰고 발버둥 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죠. 더 많은 사람이 연대한다면 가능성이 커지겠으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참해야 문제가 해결될지 알 수 없죠. 기득권이 스스로 포기할 때, 또 정부가 국가와 사회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비로소 사라질 문제에 가깝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울고 있는 사람들을, 좌절해서 힘이 빠진 사람들에게 팩트 폭행을 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찌 보면 이들이야말로, 어떤 경우에는 우리들이야말로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비록 실질적이지는 않더라도 그저 포근한 포옹이 도움이 될 수 있죠. <브로커>와 <천 명의 락커, 하나의 밴드>가 바로 그런 영화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