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 안에 인간, 정치, 자연을 담다
1. 영화라는 예술은 기본적으로 시각에 의존하는 장르다. 소리가 안 나오는 영화는 무성영화라고 하지만, 영상이 안 나오는 영화는 영화라고 부르지 않듯이. 따라서 영화는 스토리를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핵심이 되는 매체이기도 하다. 캐릭터의 표정, 제스처를 어떻게 보여줄지, 배경은 어떤 모습으로 설정할지, 조명은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밝게 할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은 좋은 영화를 위해서 필수적인 과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색깔'을 통해 관객들은 가장 직관적으로 영화를 이해하곤 한다. 김훈 작가의 소설 <남한산성>을 영상으로 옮긴 <남한산성>은 영화의 영상미 중 색깔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2. <남한산성>은 원작에 굉장히 충실한 영화로 영화의 전개, 인물의 대사 등 모든 방면에서 원작을 그대로 따라간다. 영화 제작자가 창의적으로 재해석한 장면은 거의 없다. 하지만 원작을 접한 와중에도 영화가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원작 소설의 핵심인 '무기력함', 그리고 무기력함에 비롯된 '절박함'의 정서가 대비되는 색감의 영상을 통해 제시되기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다.
우선 남한산성 안에서 고립된 채 청나라에 맞서는 조선의 상황은 말 그대로 '무력한' 상황이다. 신료들은 청과의 화친과 전쟁을 두고 격론 하고, 삼남(충청, 전라, 경상도)의 군사들을 불러 모으려 한다. 하지만 인조의 맥 빠진 반응이 보여주듯 청은 조선의 절박한 시도를 비웃듯 압도적인 군세로 승기를 잡는다. 이러한 무력함은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겨울과 맞물리며 극대화된다. 겨울이 맞서서 대응할 수 없는 인간은 없듯, 청에 조선이 대항할 수 없는 것 역시 정해진 사실인 것이다. 추위에 떨며 얼어가는 조선 군인들과 풍족한 식량과 따뜻한 군영에서 지내는 청군의 비교는 이러한 사실을 관객들에게 거듭 일깨워 준다. 조선군이 시도하는 일말의 공격은 참혹한 실패로 귀결되며 청의 압도적인 힘을 강조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의 좌절, 절망, 실패를 보여주는 화면은 대체적으로 '하얗다'. 눈이 떨어지는 배경은 하얗고, 밤은 푸른색이며 그저 추울 뿐이다.
3. 작중 '무력함'은 김상헌과 최명길의 대사를 통해 '절박함'으로 이어진다. 이 절박함은 김상헌(김윤석)과 최명길(이병헌)의 대사와 대립을 통해 형상화된다. 역사가 스포일러지만, 두 인물의 대립은 강력한 서스펜스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마치 법정 드라마를 보는 듯 빠르게 치고받으면서 이어지는 김상헌(김윤석)과 최명길(이병헌)의 대사는 역사를 아는 관객들과 영화 속 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정보의 차이를 만들어내며 극적 효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이들의 '절박함'은 작중 붉은색으로 드러난다. 작품의 초반부에 김상헌(김윤석)이 노인의 도움을 받아서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 씬이 있다. 김상헌은 청군이 도와달라면 도와주겠다는 노인을 남한산성으로 데려가려다 실패하고 후환을 대비하기 위해 그를 죽인다. 이 씬은 노인의 피를 비춘 뒤 익스트림 롱 쇼트를 이용해 흰 눈이 가득한 강터에 김상헌과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노인의 모습을 비추면서 끝난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백성의 목숨마저 죽여야 하는 절박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씬인 것이다. 반격에 나섰다가 섬멸당하는 조선 군의 모습 뒤로 붉은 석양이 지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4. 이렇듯 영상을 통해 직관적으로 영화를 보는 사이, <남한산성>은 김상헌과 최명길의 대사를 통해 관객들을 이성적으로, 또 감성적으로 공략한다. 관객들은 병자호란의 결과를 알고 있다. 최명길의 주화론이 옳고 김상헌의 척화론이 틀렸다는 것을 역사의 결과로 안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최명길에게 감정적으로 친밀함을 갖게 되고, 김상헌을 배척하게 된다. 그러나 작중에서는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최명길에게 적대적이며 김상헌을 그들의 대변인으로 내세운다. 여기에 더해 김상헌의 강직하면서도 따스한 인간적인 성품이 작중 내내 강조되면서 관객들을 더욱 당황스럽게 한다. 이러한 기묘한 관계의 역전은 치열한 논리와 시대적 상황 속에 터져 나오는 두 등장인물의 절박한 대사와 함께 변변한 전투씬이 없음에도 전쟁영화 못지않은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며 전쟁영화에서 부족한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보충해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5. 그간 한국의 사극들은 자극적인 스토리와 화려한 눈요기, 스타 배우들로 무장해서 관객들을 유혹하고 했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그러지 않는다. 화려한 연출, 편집 효과도 없다. 그저 담담한 영상과 조선의 왕, 신료, 백성들의 보습만을 우직하게 자신의 색깔과 호흡으로 담아내며 원하는 바를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한국 영화의 또 다른 진면목을 보고 싶다면 <남한산성>을 한 번쯤 감상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