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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썰킴 May 18. 2024

독서는 추억이 된다(1)

1. 책 읽는 밤

 나는 주로 밤에 책을 읽는다. 낮에 분주했던 마음이 밤에는 차분히 가라앉곤 한다. 퇴근하고 이따금씩 천 주변을 따라서 걷는다. 하늘과 물 위에는 달이 하나씩 떠 있다. 이 두 개의 달을 보며 천변을 걷는다. 마음이 자연스레 조용해진다. 귓가에는 바람이 부드럽게 스쳐간다. 이따금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 소리에 시선을 옮긴다. 물고기가 튀어 오른 자리에는 원형의 물결이 번진다. 나는 그 광경에 시선을 둔다. 물결은 파동의 중심으로부터 선명하게 생성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희미해진다.    

 

 나는 걸으며 낮에 있던 크고, 작았던 일, 기쁘고 슬펐던 순간들에 대해 떠올린다. 그리고 지나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를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 생각들은 물 위의 물결이 생성되어 소멸하듯 생각이 일었다가, 점차 희미해진다. 그런 시간마저도 지나가버리면 나는 더 깊은 마음속으로 침잠한다. 마음이 적막하고 고요해진다.   

  

 이 고요한 마음을 끌고 집에 와 책상에 앉는다. 취업, 건강, 미래, 돈, 인간관계와 같은 현실적 문제는 마음 한 켠으로 밀어 놓는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시집을 한 권 책상에 놓는다. 나와 맞는 시 한 편을 골라 연습장을 펴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쓴다. 과일을 압착하듯 시를 압착한다. 


 시어마다, 문장마다 맛과 향이 배어난다. 그 배어난 시의 맛과 향에 나는 한동안을 음미하며 시간을 보낸다. 나의 입맛에 꼭 맞는 시를 찾을 때마다 나는 기뻤고, 시를 더 즐기게 될수록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현실 너머의 세계가 있음을 알아갔다. 물질의 논리로 가치를 논할 수 없는 고차원의 정신세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말이다.           


 꿀단지를 몰래 꺼내, 소리 죽여 단맛을 탐닉하던 어린아이처럼 나는 매일 밤 시를 탐했다. 일 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고, 수년이 지났다.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나에게 체득되는 개념들이 있었다. 글의 맛과 멋, 글의 깊음과 넓음, 글의 향기, 수사법, 문장과 문장의 낙차와 이음새 같은 개념들이 점진적으로 머릿속에 형성되었다. 

 

 매일 밤 시인들이 구축한 자유분방한 시의 세계를 접하며, 그들이 세상을 읽는 방식에 감탄하고 전율했다.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동이었다. 소설에서는 작가가 정교하게 구축한 세계에 살아보는 경험이었다면, 시는 나의 해석에 따라 의미의 중심축을 이동시킬 수 있었다. 시 안의 공간은 넓고도 자유로웠다. 활자로 구축된 시라는 공간 안에서 사유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었다.      


 전채 요리로 식욕을 돋우듯, 나는 매일 밤 시를 읽고 독서욕을 돋궜다. 한껏 높아진 독서욕으로 나는 나의 본 게임을 치러 나갔다. 나의 상황에 따라, 관심사에 따라 책의 장르는 조금씩 변했지만, 일단 시작하면 꾸준히 읽었다. 소설을 읽으면 나를 거기에 투영해 보고, 지식서를 읽으면 지식의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읽어보고자 했다. 모든 책들은 나에게 항상 다른 얼굴로 다가왔었다.      


 삶이 힘들어 가슴이 메마를 때면 나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는 단비 같은 책도 있었다. 때로는, 편견과 굴절된 시각으로 지어진 나의 세상을 오함마로 부숴버리는 책도 있었다. 그렇게 책 읽는 밤은 나에게 똑같이 반복되는 날이 아니었다. 책의 얼굴은 변검에서 얼굴을 바꾸듯 매번 다른 얼굴로 다가오는 나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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