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를 해줘도 1을 못해줘서 미안하다는 사람', '저는 10으로 해주거든요. 제가 9를 해줘도 1이 모자란 사람이기 때문이죠'
그와 만났던 순간은 늘 찬란했다. 서로만이 알 수 있는 애칭을 정해 가는 과정이 즐거웠다. 애칭은 하나 둘 축약됐다. 남들이 들으면 외계어였을 거다. 하지만 우리의 세계에선 언제 어디서든 통하는 공용어였다. 서로가 어떻게 웃는 지도 너무도 잘 알았다. 오히려 상대가 웃지 않았을 때 머쓱하고도 씨익, 미소가 얼굴에 퍼졌다. 혼자 있을 때도 그랬다. 연애를 하는 이유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헤어진 순간은 가장 깜깜했다. 축약됐고 단단히 약속된 언어는 풀어져서 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입 밖에 나오질 않나 보다. 말을 하지 않고도 상처를 줬고, 아픈 말로 되로 받은 적도 있었다. 요즘엔 '이별'을 '이 별'로 띄어 읽고, '이 별'에서 기다린다고 한다지만, '이 별'이 다가오는 걸 손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고개를 떨구며 받아들일 수밖에.
보통의 연애다. 한 판의 바둑이 끝나고 귀찮았던 복기와 달리, 이별의 이유를 돌아보는 건 유전자의 명령일까. 자연스레 떠오른다. 눈이 부시듯 빛나는 순간과 눈을 감지 않았는 데도 어두워진 장면이 교차한다. 끝내 몸 한편에 느껴지는 건 쓰린 심장이다. N번의 연애를 하다 보면, '9를 해줘도 1을 못해줘서 미안했단 사람'을 만나고 '9를 해줘도 1이 모자라 화가 나는 사람'도 만난다. 9와 1이 7과 3이 될 수도, 5대 5가 될 수도 있다. 숫자에 옳고 그름은 없다. 맞냐 안 맞냐가 있을 뿐이다.
5만 해줘도 자신이 5를 채우면 된다는 사람도 있어요. 각자 7씩만 하자는 사람들도 있고요. 상대에게 '너는 왜 그렇게 안 해?'라고 하는 건 폭력이에요. 그런 상황에서는 상대 기준에서 생각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상대를 잘 알아야 하고 본인에 대해서도 상대에게 알려줘야 해요. 그래야 원만한 소통이 되거든요.
사실 1이니, 9이니 이게 무슨 말장난 아닌 가 싶기도 하다. '10'만큼의 관계가 어디 있나 싶고, 시기와 환경에 따라 애정이 달라질 수도 있다. 이렇게만 하면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이상'에 가닿을 수 있을까. 연애가 원래 그런 거라며 '현실'에 얽매일까. 그래도 연애가 인간의 본능 가운데 가장 따뜻한 게 맞다면, 할 수 있는 최소한이 아닌 가 싶다. 상대 기준에서 생각하면서 나를 지키는 것. 연애만큼은 '갑과 을'의 사회적 용어가 아닌 온전히 서로를 품을 수 있는 개인이 됐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