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엘리베이터에 갇힌 날이었다. 1층과 2층만 있는 단순한 한강변의 엘리베이터 안이다. 다행이라고 할까, 1층에서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다만 엘리베이터에 갇힌 게 31년 인생에서 처음인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고장의 이유는 짐작컨대 작은 자전거를 들고 탄 아저씨 때문이었다. 나와 한 아주머니가 먼저 탔는데, 그 사이를 파고든 아저씨의 작은 자전거 때문이었다고 여겼다. 1평도 안 되는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이 셋, 자전거도 셋. 엘리베이터는 갈수록 타들어갔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저도 타도 될까요" 이 한 마디에 재깍 "안 됩니다"라고 했어야 할까. 그럴 수 있는 게 과연 생각의 흐름과 사회의 통념상 가능했을까. 애초에 편하게 엘리베이터를 타자는 생각이 잘못됐을까. 자전거를 들고 계단을 내려갔어야 할까. 오늘은 쉬었어야 했을까. 후회는 멈출 줄 몰랐고, 후회의 답은 불쑥 찾아온 아저씨를 향한 화였다.
다만 화를 내지 않은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엘리베이터가 멈춘 게 저 아저씨 때문이란 걸 확신할 수 없었다. 또 화를 내도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의 원칙 같은 것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 특히 안 좋은 일을 돌아보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는 사고는 중요하나, 왠지 다시 찾아올 것 같지 않은 불행을 되새김질하는 건 크게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결론 내렸지만, 사실 결정적인 계기는 같이 탄 아주머니의 전화 덕분이었다.
어주머니는 갇혀 있는 그 짧은 시간 사이에 4통의 전화를 주고받았다. 처음 통화는 엘리베이터 담당 직원과 했고 2통은 119와의 전화였고, 1통은 함께 왔지만 어딘가 따로 떨어져 있는 아들로부터 걸려왔다. 엘리베이터 담당 직원은 119로 전화하라는 무책임한 말만 남겼고, 119 직원은 애먼 곳으로 찾아간 것도 모자라, 아주머니가 상세하게 알려주지 않은 탓으로 돌렸다. 아들은 속도 모르고, 아주머니에게 왜 거기 갔냐고 따져 묻는 듯했다.
놀랍게도 아주머니는 단 한 번의 짜증을 내지 않고 온전히 받아넘겼다. 신경이 곤두설 수 있는 대화 속에서도 말이다. 이게 얼마나 대단하냐면, 찜통처럼 더운, 텁텁해진 엘리베이터 속에서 약 30분을 갇혀 있는 환경과 갑작스레 닥쳐온 불운 속에서 곤두서는 신경의 본능을 모두 거스른 거다. 게다가 서른한 살 남자가 씩씩 화를 참고 있는 침묵까지. 자연스레 그의 화도 풀려갔다. 어쩌면 저렇게 침착할 수 있을까.
뒤늦게 온 119 직원 분들의 표정이 마치 한강의 아침 햇살처럼 느껴졌다. 아주머니는 무심히 자전거를 밖으로 꺼냈고, 아들에게 전화한 듯했다. 예기치 않은 불행을 마치 올 줄 알았다는 듯, 넘기는 인생은 생의 수많은 경험이 만든 능력일까. 아니면 이미 벌어진 일에 원인을 찾는 일은 무의미하다는 감각을 깨우치신 걸까. 불행하다 느낌 경험도 엘리베이터 문을 나오는 순간,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느낀 경험은 언젠가 저런 멋진 태도로 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