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2. 순간에 관하여
만화 <슬램덩크>의 가장 몰입도 높은 시퀀스는 강백호의 북산과 고교 최강 산왕공고의 대결이죠. 대사 하나 없이 표정과 동작으로 끌고 가는 마지막 2분은 백미입니다. <슬램덩크>를 보지 않은 분들도 알 만한 명대사들도 여기서 등장합니다.
강백호의 ‘왼손은 거들뿐’, 정대만의 ‘포기를 모르는 남자’, 안 선생님을 향한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인가요’ 농구팬으로서 언제 봐도 뭉근한 대사인데, 10번째 읽는 중에 언제나처럼 감동하다, 새롭게 들어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씩’ 웃는 서태웅입니다.
서태웅의 웃음은 의외로 위기의 순간에 나옵니다. 산왕공고의 에이스인 정우성, 이 선수에게만 18점을 내준 뒤입니다. 정우성은 ‘언더독’ 북산에게 밀리는 산왕을 위기에서 구해내지만, 서태웅은 그렇지 못하죠. 경기 내내 정우성에게 공을 뺏기고 막히면서 한 점도 올리지 못합니다.
작가는 보통의 성장형 만화처럼, 절망을 털어낸 주인공이 홀로 잠재력을 폭발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서태웅이 갑자기 집중해 슛이 모두 들어가거나, 정우성을 제치는 드리블을 선보인 건 아닙니다. 서태웅의 다음 플레이는 예상을 벗어납니다.
서태웅은 동료들에게 손을 내밉니다. 정우성을 벗겨내려 애쓰다 허를 찔러 채치수의 덩크를 만들고, 지쳐있던 정대만의 3점 슛을 이끌어냅니다. 그러자 정우성도 흔들립니다. 이 순간을 노린 듯 서태웅은 기어이 라이벌을 완벽히 제쳐내는 드라마를 씁니다.
습관은 반복해서 생겨나는 행동 양식.
습관은 결국 우리가 순간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투표하는 것과 같다
<아주 작은 힘의 습관>이란 책을 쓴 제임스 클리어의 말입니다. 서태웅의 미소가 갑자기 눈에 들어온 이유는 아마 지금껏 플레이 하나하나의 중요성을 잊고 살았기 때문인 듯 쉽습니다. 서태웅처럼, 돌파가 안 되면 끝까지 뚫어보려고 했습니다. 같이 뛰는 친구들보다 제 생각을 먼저 한 것이죠.
패스 하나, 리바운드 하나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동료를 도우려는 움직임이 부족했습니다. 이런 플레이는 종국엔 타인을 도우면서 스스로를 일어서게 만드는 행동임을 이제 조금씩 깨닫습니다. 결국 서태웅이 정우성을 넘어서듯 말이죠.
10년 전, 드라마 <미생>에서 "순간의 선택이 전체를 좌우한다"는 명대사를 기억합니다. 코트에서의 플레이처럼, 하루하루의 대국은 '한 번쯤 어때'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심심하면 유튜브를 보거나, 인스타그램을 켜곤 했죠. 물론 이런 시간도 필요하지만 이제 조금이라도 더 값진 가치에 더 많은 표를 행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