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_1
병가와 남은 연차로 두 달이 넘는 여름을 지내고 있었기에 퇴사 날짜가 정해졌다고 한들 일상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에 대해 몸은 거의 적응이 되었는데 마음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의 마음과 퇴사자로서의 마음은 다른 것 같았다(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기에 애매한 표현).
더구나 이직은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 머릿속에서는 뭔가 결정되지 않은 자의 불안함이 통장 잔고의 줄어듦에 비례해 커지고 있었나 보다.
참, 11개월의 실업급여를 받고 있었다. 얼마나 감사한가.
또 그 동안 부실했던 엄마의 자리를 메꾸기 위해 아이의 일상에 비집고 들어가기엔 틈이 좀 좁다고나 할까. 쉽지 않았다.
무엇이든 해야했다.
생각 많은 머릿속이 복잡해서라도 뭔가 정리를 하고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었다. 굳이 나열해 본다면 이 정도였다. 회사 다닐 때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읽어냈던 책들, 성경 읽기, 아이패드로 그림 그리기, 꽃꽂이, 글쓰기, 운동하기, 집밥하기, 카페 죽치기, 여행... 참 별 거 없었다.
2022년 초, 난 VM(Visual Merchandising)관련하여 이런저런 글을 쓰고 있었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일만 하면서 느낀 감정, 직장 생활 등에 관해 두서없이 썼던 글들이 있었다. 글들을 모아 책을 쓰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이 때가 딱 적기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현실적으로 참 맞는 생각이긴 하지만 회사 다니면서 시간을 쪼개서 글을 쓸 때보다 글의 진도는 잘 나가지 않았다. 여기 저기 써 놓은 글들을 보니 또 연결되는 생각들이 글 쓰는데 참 방해가 되었다. 나는 마감 날짜를 정하고 일을 해야 잘하는 스타일인가. 마음을 다잡기 위해 스터디 카페를 등록하고 하루의 반나절 정도는 글쓰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글을 쓰면서 잡생각은 얼마나 머릿 속에서 맴도는지... 저녁은 뭘 해먹을까, 책을 좀 읽고 싶다, 카페가면 글이 더 잘 써질 것 같다, 친구들은 지금 뭐할까 등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고 시간은 또 그렇게 잘도 흘러갔다. 스터디 카페를 몇 개월 다니면서 글을 반쯤 썼을 때부터 출판사에 투고하기 시작했다. 내용은 비슷하지만 디자이너답게 각 페이지의 디자인과 레이아웃을 바꿔가며 일주일에 한 번씩 출판사에 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주 정중히 거절하는 출판사, 메일 확인도 안하는 출판사, 일단 만나자고 요청하는 출판사 등 다양한 반응들에 매일의 내 마음이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다. 이러다가 책 출간을 못하면 어쩌지, 이상한 출판사(?)를 만나면 어떡하지 등 연락이 와도 안와도 온갖 인터넷에 떠도는 믿지못할 정보들을 서치하며 내 마음은 갈피를 못잡던 시간들이었다.
그 때, 내 마음은 2022년 12월 마지막 날까지 단 하나의 목표가 책 출간이었다. 이리저리 마음이 쓰여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 작가님들은 깊은 산 속이나 외국에 가서 글을 쓰고 마무리를 하는구나. 전문 작가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바람이 불 때 쯤, 남은 원고에 집중하는 시간외에 서점에서 책의 뒷면에 있는 메일 주소를 촬영해와서 투고하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목차의 흐름을 볼 때 원고의 95% 정도 완성한 것 같았다. 그 무렵, 감사하게도 지금의 출판사 대표님과 인연이 닿아 책을 출간 할 수 있게 되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데 눈물이 흐르고 손이 떨렸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긴 시간 글과 실랑이 했던 시간이 있었기에 초고는 곧 완성이 되었고 친한 지인 두 분께 원고를 읽어봐 달라고 요청드렸다. 내가 실무에서 사용했던 지식과 업무들이 보편적인 VMD이길 바랬다.
대표님께서 직접 책 제목을 정해 주셨고 책표지와 내부 교정을 마쳤다.
2022년 12월 31일,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인쇄소에서 처음 나온 따끈한 책,
[ 나는 비주얼머천다이저(리즈앤북, 2023) ]를 받았다.
퇴사 후, 잘한 일 첫 번째는 책 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