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의 비둘기똥과 뿡뿡이

만약 행복에도 냄새가 있다면

by 삥구

뿌또의 자취방은 서울 외곽의 가파른 언덕 위에 있었다. 붉은 벽돌집이 죽 늘어선 골목길에서도 한 번 더 꺾어 들어가야만 나오는 언덕이었다. 그곳에는 비둘기 먹이를 주지 말라는 다소 살벌한 경고문이 붙어 있었고 그 밑에는 비둘기 똥들이 들러붙어 있었으며 언덕 앞의 대충 바른 시멘트 담장 위에는 언제 버려졌는지도 모를 뿡뿡이 네발 자전거가 언덕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들 모두 뿌또가 그 동네를 떠날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던, 명실상부 그 언덕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겠다.


뿌또는 그 동네가 좋다고 했다. 왜인고 하니 어렸을 때 봤던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그런 동네에서 살았더란다. 주인공들은 늘 붉은 벽돌로 된 집에서 살며 옥탑방에서 아니면 반지하에서 이러쿵저러쿵 복닥복닥 살았다고, 그래서 이사할 곳을 찾아다녔을 때도 이 동네의 붉은 벽돌집 골목을 보고는 여기다 싶었다는 거였다. 참 속 편한 소리군,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런 뿌또의 말을 이곳 주민들이 들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뻔한 말이긴 하지만 세상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해탈한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다들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에 깊게 몰입해 있으니까.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너무 과몰입해서 비극 속에만 있을 때도 있으니까. 그럴 때 뿌또의 말이 딱 들려온다면, 그 순간만이라도 몰입에서 빠져나와 삶을 조금만이라도 더 멀리서 마치 텔레비전 속 시트콤을 보는 것 마냥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때 우리는 그 언덕 위의 동네를 산책하고 있었다. 때는 초여름의 일요일 오후였고, 따스한 햇볕이 골목길을 내리쬐고 있었다. 뿌또와는 처음으로 함께 맞이하는 여름이었다. 조금 더 걷자 작은 놀이터가 하나 나왔다. 뿌또는 거기에 있던 음수대에서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진심으로 맛있어했다. 마실 수 있는 서울의 수돗물이라고는 하지만 수돗물 특유의 쇠맛을 좋아하지 않던 나에겐 그게 좀 신기했다. 이후 인천공항에서도 음수대를 보고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찾은 것 마냥 좋아했던 걸 생각하 나는 또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낭만이 거기에 있는 거겠지.


약 행복에 냄새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행복함을 느낄 때마다 아주 기분 좋은 냄새 같은 것이 풍긴다면. 절대로 질리지 않고 대체될 수 없는 냄새가 풍긴다면 어땠을까. 실제로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 연구진의 연구에 따르면 세상에 '행복한 냄새'라는 게 존재한다고 한다. 이 연구진들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다양한 영화를 틀어준 뒤 행복할 때, 무서울 때, 그리고 중립적인 상황일 때의 겨드랑이 땀을 채취했다. 이후 다른 그룹의 사람들에게 무작위로 이 겨드랑이 땀을 맡게 한 뒤 이들의 얼굴 근육의 움직임을 조사해 보니 행복한 장면을 봤을 때 나온 땀 냄새를 맡으면 행복한 표정을 담당하는 근육을 더 많이 썼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무섭거나 중립적인 장면에서 나온 땀 냄새에도 그 각각의 감정에 따른 표정 근육을 썼음은 물론이다. 결론적으로 이 연구는 인간 역시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후각을 통해 정보를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단지 후각이 퇴화했기에 그 정보를 다른 동물들보다는 덜 예민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만일 인간이 지금보다 후각이 더 발달했다면 이 사회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을 수도 있다. 후각적인 정보를 시각적 정보보다 더 우위에 들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멋진 차, 집, 명품 시계나 가방이 아니라 행복한 냄새가 풍기느냐 풍기지 않느냐로 삶의 풍요로움을 측정하는 것이다. 행복이 정량화할 수 있는 사회다. 하지만 그쯤 되면 계급화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간의 특성상 행복하지 않은 사람과 행복한 사람의 계급을 또 나누려들지 않을까. 그렇게 행복이 '냄새'라는 완벽한 증거로 판명이 나 버리고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면, 심지어 실제로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에게 행복한 냄새가 더 많이 풍긴다는 것이 사실화되어 버린다면 물질만능주의가 더 심화되는 건 아닐까. 역시 이것도 그리 행복한 사회라고 단언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래도, 그날 음수대에서 수돗물을 마시던 뿌또에게서 행복의 냄새가 풍겼다면 나도 조금 더 그 행복함에 흠뻑 빠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20대 때는 세상의 행복을 즐기는 방법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완벽하게 낯선 장소에 갔을 때, 밤을 새우며 젊음을 낭비했을 때, 처음으로 혼자 있는 고요함으로 충만해졌을 때. 행복은 무척 강렬해서 순식간에 도취될 수 있는 알코올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책 제목이 그러하듯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 아이처럼 뛰어노는 것이 아니라 돗자리를 펼치고 앉아 뛰어노는 아이들을 관망하는 것이다. 뿌또와 나 모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깊게 사랑하는 뿌또와는 달리 나는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서 조금 더 자극적인 행복을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늘 충족되지 못한 자극을 기다리며 지금의 행복에 아쉬워하게 되고 나는 왜 이렇게 행복을 더 잘 느끼지 못하는 걸까 하고 자책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 평화로움이 행복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 행복을 더 잘 느끼고 싶은 욕구다. 예상컨대 이건 어린 날에 느꼈던 카타르시스의 상실로 인한 향수병인 것도 같고, 소위 말해서 '도파민으로 절여진' 숏폼 콘텐츠 때문에 생긴 일종의 '도파민 병'인 것도 같다.


"짜잔, 어때?"

그날 나는 뿌또의 손을 붙잡고 처음으로 그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올랐다. 거기에는 뜬금없게도 정말 멀끔한 도서관이 하나 있었다. 뿌또가 최근에 발견했다며 내게 소개해주고 싶다던 곳이 바로 그 도서관이었던 것이다. 도서관 내부는 놀라우리만치 깔끔하고 감각적이었다. 은은한 주황색 조명이 책장마다 달려 있었고 널찍한 나무 책상과, 앉아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는 높다란 계단이 있었다. 그 도서관 뒤편에는 주민들이 즐길 수 있는 공원도 있었다. 농구코트에서 농구를 하는 고등학생들, 배드민턴 치는 중년 부부, 바둑을 두는 노인들, 끝없이 모래운동장 트랙을 돌고 있던 가지각색의 사람들까지. 이 동네 사람들은 다 여기 있었네, 하고 뿌또가 말했다. 그 언덕을 안지 거의 반년만에 처음 본 광경이었다. 나는 모르는 어떤 꾸준한 삶들이 내가 몇 번이고 지나쳤던 그 언덕으로부터 조금만 더 벗어난 곳에 있었다니. 역시 뭐든 조금만 더 벗어나보는 자세가 필요한 듯싶다. 내가 그 동네를 사랑하게 된 것은 바로 그날부터였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뿌또도 집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매번 출근 때면 먹이를 먹는 십여 마리의 비둘기 때를 쫓아야만 언덕을 내려갈 수 있었다. 밤에는 뿡뿡이의 얼굴이 무서워 보인다고, 왠지 귀신 들린 것만 같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뿌또는 자신의 집을 항상 '고독한 골방'이라고 불렀다. 진심 반 애정 반으로 말했다. 그 동네에서 우리는 서로 싸우기도 했고 선선한 선풍기 바람을 쐬며 까무룩 잠들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시간이 지나 그 동네를 떠나자마자 그 동네가 그리워지고 말았다. 만일 사람들이 어쩌다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 언덕 위의 고독한 골방을 이야기할 것이다. 시작은 가파른 언덕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멀리서 보면 시트콤 같은 그런 곳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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