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시간이 중첩된다면
뿌또와 1000일이 되어 시청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랜만에 들른 시청역 5번출구에는 전에 없던 화단들이 많이 생겼고 널찍한 광장에는 운동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어떤 행사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서울 도서관이라는 곳을 발견했다. 한국은행과 같은 옛 개화기 시절의 건물 디자인에 묵직한 나무 문패가 걸려 있었다. 여기에 도서관이, 그것도 '서울'도서관이 있었다니. 그때 불현듯 내가 전에 서울 도서관에 회원가입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서울 통합 도서관 어플인 줄 알고 깔아서 회원가입까지 했다가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좀 짜증을 냈었는데 그걸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마치 뒷담화로 건너 듣기만 했던 인물을 만난 것 같이 좀 어색했달까. 잠깐 건물에 들어가 지하에 있는 자료실에 들어가니 꽤나 널찍하고 쾌적한 공간이 나왔다. 차분한 공기 속에서 저마다 자리를 잡고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 사람들은 이 근처의 주민들이었을까. 아니면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와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었을까. 꽤나 연식 있어보이는, 개화기 시절 건물 디자인 때문에 나는 이 도서관이 지내왔던 세월들을 상상했다. 하지만 이후에 서울 도서관의 개관일이 2012년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 건물은 원래 옛 서울 시청 건물이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이럴 수가. 혹시 이거 상식이었나? 괜찮아 난 경기도민이니까. 이렇게 또 은근슬쩍 회피해본다.
아무튼, 감상에 좀 젖어 있을 때 뿌또가 시청역에 도착했다. 손을 잡고 서로 마주보며 웃었는데 순간 기분이 묘했다. 딱 1000일 전, 우리는 바로 그곳 시청역 5번 출구에서 처음 만났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내가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을 시절, 나는 연애가 하고 싶었다. 이전 직장에서는 너무 호되게 마음고생을 했던 터라 '연애'의 '연'자도 생각나지 았았건만, 이직하고 나니 조금 여유가 생기면서 그와 동시에 옆구리가 슬슬 시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왜 인간은 만족을 모르고 계속해서 또 다른 결핍을 만들어내는 걸까?) 그 해 초봄에 회사 근처에서 대학교 친구들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나 요새 연애하고 싶다고, 사람 좀 소개해 달라고 한탄했더니 결국 그게 나비의 날갯짓이 되어 그 해 가을, 지금의 뿌또를 소개받게 되었다.
소개팅 당일. 나는 갈색 셔츠와, 그보다 조금 더 진한 갈색 니트 롱 스커트를 입고 베이지색 마스크를 꼈다. (그때 당시는 코로나가 한창인 시기였다) 완벽한 갈색 인간 그 자체였달까. 그런 차림은 그 이전에도 입은 적이 없었고 그 이후에도 입은 적이 없었는데 왜 그 날따라 갈색 인간이 되고 싶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오랜만의 소개팅에 설레고 긴장되었다. 제발 이상한 사람만 아니길. 드디어 역 앞으로 나와 탁 트인 거리를 휘휘 둘러보았는데 나와 비슷한 갈색 셔츠를 입고 까만 슬랙스를 입은 남자와 어색하게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마치 당근 거래하러 역 앞에 나왔을 때 거래 당사자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 어 당신인가요? 어어 맞아요. 같은 말이 오고 갈 것 같은 순간. 그 남자는 뒷머리는 조금 길어서 살짝 덥수룩하고, 키는 나보다 머리 하나 크기 정도 컸다.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눈빛이 부드러웠다. 우리는 인사를 나눴고, 난 살짝 고장이 나서 대뜸 '아 제가 최근에 머리를 잘랐거든요, 사진이랑은 좀 다르죠?'라고 말했다. 그 후 그 남자가 뭐라고 말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목소리가 꽤 단단하고 따뜻했던 것만큼은 기억난다. 문득, 우리 둘 다 갈색 셔츠를 입고 있어서 누가 봐도 커플인 것처럼 보이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함께 나란히 걷는 길. 원래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는 일부러 말을 더 거는 성격인데도 불구하고 그 땐 의식적으로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뭐랄까, 괜히 조급해보이고 싶지 않았달까. 그래서 잠깐의 그 어색한 공기도 첫 만남의 설렘처럼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뿌또의 말을 들으니 본인은 그 어색함에 어쩔 바를 몰랐다고 한다.
그 날 우리가 갔던 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양식점이었다. 어둑한 지하로 내려가니 중후한 벽돌 인테리어에 잘 갖춰입은 웨이터들이 있었다. 하얀 테이블보가 덮힌 원형 테이블에 앉아 마스크를 벗는데 그제서야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뿌또의 턱은 얄쌍하다. 그에 반에 나는 각진 턱이다. 그래서 좀 낯설었달까. 원래 하관이 닮은 사람들이 사귄다는 말이 얼핏 스쳐지나갔다. 메뉴판을 받으니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현란한 영어 메뉴들이 보였다. 어어 뭘 골라야하지... 둘 다 살짝 기 빨리는 듯 어찌 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느낌.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렇게 얘기하다가 처음으로 좀 소리 내어 같이 웃었는데 좋았다. 나쁘지 않은걸. 일단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절반 이상은 성공한 거다.
이후에 정확히 뭘 먹었는지는 기억 나지 않는다. 뿌또네 고향이 인천이라기에 인천하면 펜타포트 페스티벌이 유명하죠. 언제 한번 같이 가요! 라는 말을 했지만 1000일이 지난 지금 아직 한 번도 펜타포트 페스티벌을 간 적이 없다. 밥을 먹고 나와서 청계천을 따라 쭉 걷다가 버스킹 공연을 봤다. 거기서 콜드플레이의 '비바 라 비다'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언제 한 번 제가 아는 단골 LP바 가시죠! 라고 했으나 1000일이 지난 지금 아직도 둘이서 LP바를 가본 적이 없다. 그 LP바도 너무 가지 않게 되어 더 이상 단골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소개팅이란 그런 거다. 일단 얘깃거리라면 던져 놓고 본다.
1000이 된 그 날, 그 식당을 다시 찾았다. 여전히 말끔하게 차려 입은 웨이터들이 친절하게 자리를 안내해주었다. 고작 1000일에 두 번째 갔던 것인 데도 익숙하고 많이 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건 왜였을까. 주변으로 모두 다 커플들이었다. 나이대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정도. 소개팅이거나 아직 커플이 아닌 상태. 여자들도 잘 차려입었지만 특히 남자들의 왁스를 바른 듯 기합이 들어간 머리 세팅이 눈에 띄었다. 말하자면 미국 교포 스타일이다. 나와 뿌또는 테이블에 앉아 이것저것 새로운 메뉴들을 시켰다. 1000일 전에는 아마 알리오올리오같은 제일 무난한 걸 시켰을텐데 이제는 모든 메뉴를 다 심사숙고해보고 도전적인 메뉴를 시켜보는 여유가 생겼다. 우리는 다른 테이블에서 풍기는 그 어색하고 살짝 설레이는 분위기를 은근히 즐겼다. 남자는 무척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데, 저 뒤통수만 보이는 여자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지으며 그 이야기를 듣고 있을까 뭐 그런 말도 하면서.
나는 그 장소를 소개팅 장소로 해서 다행이다, 라고 말했다. 만일 다른 양식집을 골랐다면, 예를 들어 우리집 근처 맛집이었던 파스타집을 골랐다면 거긴 이제 폐업을 했으니까 절대 다시 찾아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름 오랜 세월 살아남은 파스타집을 소개팅 장소로 골랐기 때문에 1000일이 지나도 올 수 있고 또 그 이후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뿌또는 바로 1000일 전의 우리가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해보라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1000일 전의 우리가 가게 문을 열고 등장한다. 밥을 먹고 어색하게 웃고 떠들다가 계산을 하고 나온다. 서로 일정 거리는 적절히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1000일 후의 우리도 밥을 다 먹고 나와 화장실을 갔다. 1000일 전에도 갔던 그 화장실이다. 그때 난 상대가 꽤 마음에 들어 화장실 거울을 보며 얏호! 하고 작게 좋아하고 있었다. 1칸짜리 좁은 화장실이라 세면대 앞에 서면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를 완벽하게 겹칠 수 있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를 볼 수 있을까? 고차원에서는 모든 시간이 중첩되어서 이미 모든 사건이 완결되어 보인다고 한다. 만약 감정이라는 것이 고차원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거라면, 현재 나의 그 평화롭고 안정적인 감정에 1000일 전의 내가 어렴풋이 동화되어서 뿌또를 좋아하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산책해볼까?"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잡은 뿌또의 손이 무척 단단했다. 계속 잡아도 될 것 같은 느낌. 이것도 미래의 내가 보낸 신호일 수도 있다.
<더운 날엔 겹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