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모 1년 차, 어른 4년 차
내 우려와는 달리 의외로 동생과의 자취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물론 동생 입장에서는 세면대에 버려진 내 일회용 렌즈들을 보고 기겁하는 일 같은 것을 몇 번 겪어야 했지만 적어도 더 이상 언니랑은 상종도 못하겠다든가 하는 그런 치를 떨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동생은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방에서 방문을 닫고 지냈다. 언니 된 도리로서 심심하다는 명목으로 불쑥 동생의 방을 시찰 다니기는 했지만 그것만 빼면 서로 이렇다 할 삶의 접점이 없었다. 심지어 동생의 방은 자주 비워지기 일쑤였다. 동생은 학교에서 밤샘 작업을 하다가 간이침대에서 자는 일이 빈번했던 것이다. 결국엔 나 혼자 그 투룸 집에 자취하는 꼴이 되었다. 솔직히 나로서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3학년으로 올라가야 할 무렵, 1년 휴학계를 냈다. 휴학을 해야 할 큰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졸업이라는 큰 이벤트를 어떻게든 유예하고 싶었던 나의 무의식의 발현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도 그 당시에는 나의 휴학에 꽤 거창한 이유들을 붙였다. 사실 일면 비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고학년을 앞두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취업 시장에서 한 줄이라도 써먹을 수 있는 이력은 있어야 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몰라도 뭔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이 있었던 것이다.
아빠에게 휴학을 허락받기 위한 자기 계획서를 보여줬을 때도 그랬다. 이것저것 열심히 하고 전공과 관련된 개인 작업도 할 것이라는 나의 원대한 포부들이 담긴 계획서였다. 아빠가 보기에 얼마나 허술해 보였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딸들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주던 우리 엄마와 아빠는 딸의 휴학생활을 응원해 주었다. 뭐 사실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그렇게 어설프게 시작하게 된 휴학생활. 내가 했던 몇 가지 주요 일과들은 제법 계획성 있게 진행되는 듯했다. 영어회화 학원을 다녔으며 OPIC 자격증을 땄고 그 밖에 다른 국가 자격증도 땄다. 하지만 그렇게도 내가 바라마지 않았던 개인 작업은 영 진척이 없었다. 큰 깨달음이나 지적 능력 향상 같은 것도 없었다. 그 대신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삶의 방식 같은 것만 배우게 되었다. 모두 이력서에 적어낼 수 없는, 영 효용성 없는 배움이었다. 그것들을 세 가지로 분류해 보자면 이렇다.
휴학을 하며 다녔던 영어 학원은 자격증을 위한 영어가 아닌 순수 '스피킹'을 단련하는 단련장 같은 곳이었다. 아침 7시에 도착해 수업을 듣고, 자습시간에는 주야장천 영어로 대화를 했다. 그 학원에는 서로 다른 직업과 학과를 지닌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의무적으로 말을 많이 해야 하는 환경 특성상, 그 다양한 사람들과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취향까지 떠들어댔다.
평소에 내 이야기를 하는 데에 서툴렀던 나는 오히려 그런 환경에서 보다 쉽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누가 펴 놓은 멍석 위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하자 나도 더 이상 눈치 볼 것 없이 떠들어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도 그 당시 함께 떠들어댔던 그룹과 유대감이 생겨났다. 나는 그렇게 새로운 인연을 얻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학원을 나온 뒤에도 인연을 이어간 사람은 없었다. 딱 한 사람이 가느다란 인연을 이어나갈 뻔했으나 왠지 모를 불편한 감정이 오고 간 이후에는 약속이나 한 듯 더 이상 서로 연락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되고 나니 그 사람들과의 인연이라는 것이 다시 붙잡기도 애매한 느슨한 관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바람과 달리 꾸준한 인연이란 그리 쉽게 생기는 게 아니었다.
그 무렵부터 내겐 새로운 만남보다 헤어짐이 흔해지기도 했다. 학창 시절의 옛 인연들과도 자연스럽게 이별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한 친구는 다 함께 모이기로 한 날에 갑자기 감기에 걸렸다는 상투적인 핑계를 대고 나오지 않더니 그 후로 만날 수가 없었다. 또 어떤 무리는 잘 놀다가 헤어진 그날을 기점으로 자연스럽게 만나지 않게 되었다.
한 초등학교 동창 친구와는 아쉽게 헤어졌다. 그 친구는 초등학생 때 나에게 장조림 (그 당시에 내가 가장 좋아하던 반찬이었다) 한 통을 포장지로 정성스레 포장해 준 친구였고, 나는 한동안 그 이야기를 자랑스레 떠들고 다니기도 했다. 어른이 되어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후엔 그 친구와 종종 만났다. 나를 가장 오래 알고 있던 그 친구와 계속해서 인연을 이어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날은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버거운 날이었다. 웃고 있었지만 왠지 가식적이었고, 서로의 마음이 잘 맞지 않아 계속 덜그럭거렸다. 피곤했다. 그렇게 집으로 들어간 후로는 그 친구와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이후에 다시 그 친구가 떠올라 연락을 해보려 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답이 오지 않는 문자를 붙들고 서운하기도 했고 후회되기도 했다. 그로부터 더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 일들을 그러려니 할 수 있게 되었다. 흘러가버린 인연을 추억하되, 원래 그럴 수밖에 없는 인연이었다며 담담한 척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휴학하던 무렵, 아빠가 카페를 시작했다. 원래 아빠는 평생을 한 회사에서 회사원으로 살았더랬다. 그러다 몸이 아프셨고, 그 일을 계기로 회사에서 나와 카페를 시작하게 되신 거였다. 나와 동생, 엄마는 그 카페 일을 도왔다. 결국 '가족사업'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전까지 전단지 아르바이트나 공장 아르바이트만 해봤던 나에겐 그런 서비스 직종은 처음이었다. 오픈 첫날이라고 행사를 했던 탓에 사람들이 미어터졌던 날. 하루 종일 '어서 오세요'를 내뱉으며 포스 기를 정신없이 다루다 집에 돌아왔는데 온몸이 녹초가 되어 있었다. 잠을 자려고 누워서 선잠에 든 순간, 갑자기 누가 내 배를 꾹 누른 것처럼 숨이 터져 나오면서 '어서 오세요'를 내뱉었다. 배를 누르면 말을 하는 곰인형이 바로 그런 기분이었을까.
내겐 계속해서 낯선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그럼 일이라도 잘했어야 했는데 나는 음료를 만드는 데에도 영 소질이 없었다. 음료를 만드는 순서를 계속 까먹어서 항상 카페 벽에 붙여 놓은 레시피를 참고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괜히 아빠에게 화가 났다. 차라리 내가 원해서 하는 거면 몰라, 아빠 때문에 억지로 이 일을 해야만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빠에게만큼은 하기 싫은 티를 팍팍 내기도 했다. 아빠가 자취방을 월세 비용을 다 대주셨는데도, 당연히 일한 만큼 월급을 주셨는데도 그랬다. 영락없는 불속성 효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사실 그런 서비스업을 처음 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래도 단기 아르바이트라도 해봤지, 동생은 아르바이트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 부모님도 모든 게 다 처음이셨다. 평생을 다른 일을 하셨던 아빠와 엄마도 자영업은 무척 낯선 일이었던 것이다. 사실 우리 가족 중 그 누구도 자영업과 어울리지 않았다. 다들 내향형 인간인 데다 주위 시선에 민감했다. 말하자면 체질에 맞지 않는 일, 유전자로부터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런 사람들조차 어떻게든 벌어먹고 살려하다 보면 억지로 일에 맞춰지기 마련인 모양이었다. 부모님이 그 카페를 운영한 지도 어느덧 10년이 넘었으니 말이다. 나도 그렇게 체질에 맞지 않는 아르바이트를 5년 동안이나 했다. 말하자면 내 적성을 모른 체하고 일했던 것이다.
하루는 우리 부모님께 나의 조부나 증조부는 무슨 일을 하셨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장사를 하신 분이 계셨다. 아니, 내 유전자에도 그런 유전자가 있었단 말이야? 하고 신기해하니 엄마는 원래 그 시절에는 뭐든 돈이 되면 잡히는 대로 다 하던 시기였다고 했다. 하긴 사람이 자기 적성 찾아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은 역사적으로도 얼마 되지 않았다. 다들 그렇게 돈을 벌어왔구나, 그렇게 적응된 척했구나. 그렇게 유전자를 계승했구나.
휴학을 하기 전, 나는 첫 연애를 했다. 어른이 되었는데 연애는 한 번쯤 해봐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연애라는 도전과제를 달성하고 싶어서 소개팅을 받았던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서툰 연애. 어디에서 본 듯한 그럴듯한 연애를 하기 위해 애를 썼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아서 쓸데없는 감정싸움을 했고 상대보다 내가 우위에 서고 싶어서 자존심 싸움을 하기도 했다. 서툴러서 풋풋했지만 구질구질했던 면도 있었다. 어떻게든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서 예민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이 사람과는 언젠가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하기에는 나는 아직 젊다고 생각해서였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 사치스러운 마음 때문에 이별을 예정했다.
그러나 먼저 전화통화로 이별을 얘기한 것은 그였다. 이미 일주일간 생각할 시간을 갖고 있었던 때였으나 막상 이별을 통보받으니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애써 쿨한 척, 그래도 만나서 이별하자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기분이 묘했다.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만 이별을 생각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우위에 있는 줄 알았는데. 돌이켜보면 나는 이별하게 될 상황이 두려워서 일부러 이별을 예정하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버스 정류장에서 그 사람과 악수를 한 후 쿨한 이별을 했다. 이게 헤어짐이구나 싶었다. 나 스스로가 대견했다. 마치 세상만사 다 통달한 어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달까. 나는 이제 더 나은 사랑을 찾기로 했다. 더 진짜 같은 사랑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땐 몰랐다. 그 첫 번째 연애도 진짜였다는 것을 말이다. 바로 그 첫 번째 연애 덕분에 그로부터 꽤 시간이 지난 뒤에야 '더 나은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 나니 어느새 일 년이라는 시간이, 말 그대로 쏜 살 같이 지나가버렸다. 아빠에게 발표했던 그런 원대한 포부 중 이루어낸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휴학을 통해 그럴듯하게 성장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건만 성장은커녕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감당하는 것만 해도 벅찼던 것이다.
그래도 그 시간 덕분에 담담한 척, 적응된 척, 통달한 척하며 제법 어른인 척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소득이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어른이란 곧 어른인 척을 그럴싸하게 하는 어린이일 뿐이라고. 나는 그 시간들을 견뎌내면서 어른의 기술을 조금이나마 습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나는 내가 무얼 겪고 있었는지조차 몰랐다. 사람은 원래 그저 앞에 놓인 일을 헤쳐나가기에 바쁘니까. 그 당시의 내 앞에는 당장 해결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복학이었다. 이젠 졸업을 하고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