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모 6년 차, 어른 9년 차
친구를 자취방에 초대했을 때였다. 편의점에서 내일 아침 먹거리를 사고 있었는데 친구가 핫바를 집었다. 전자레인지에 그걸 돌려 먹자는 거였다. 우리 집엔 전자레인지가 없다고 말하니 그 친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니, 그럼 그동안 어떻게 자취를 한 거야?"
친구의 말을 듣고 나니 좀 의아하긴 했다. 그러고 보니 전자레인지는 자취하면 바로 떠오르기 마련인 자취 대표 필수템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것 없이 10년간 자취를 해 왔다니. 심지어 나는 본가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매일같이 뭔가를 데워 먹곤 했었다. 자취를 하면서도 전자레인지가 없어서 불편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전자레인지를 살 생각은 10년 동안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니 내가 전자레인지 없이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전자레인지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꽤나 만족스러웠던 탓이 컸다. 말하자면 평생을 밥솥 없이 냄비밥만 해온 할머니의 고집스러운 자부심처럼, 나도 10년을 전자레인지 없이 살아온 것에 대한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던 거였다. 햇반은 끓는 물에 넣어 데웠다. 어제 먹다 남은 치킨은 프라이팬에 구워 먹었다. 심지어 전자레인지 조리만 되는 불닭 납작 당면도 끓는 물을 이용해 이리저리 만들면 어느 정도 해결은 되었다. 몸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해냈다는 뿌듯한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니 이젠 지난 경험들이 아까워서라도 전자레인지를 살 수는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결국 자취 10년 차쯤 되면 효율적인 자취 마스터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내 어린 시절의 바람과는 달리, 나는 부족한 채로 어영부영 살 수 있는 역량만 쌓아온 셈이었다.
비단 자취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는 완벽해질 수 없었으니까,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는 대신 부족하고 미숙해도 어영부영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해나가고 있었다. 가령 덜렁대는 기질은 바꿀 수 없었으므로 그 대신 그 실수의 결과를 책임지는 방법을 터득했다. 핵심은 되도록이면 빨리 실수를 인정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그 실수를 만회해야 했다.
가령 이런 일이 있었다. 세 번째 회사에 입사하기 전, 나는 혼자서 내일로 기차 여행을 떠났다. 만성 무릎 통증으로 골골대고 있었고 예산도 빠듯했지만 그럼에도 입사 전까지 남은 그 여유 시간을 그대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쩌면 내 인생에 4박 5일 일정으로 맘 편히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생애 최초로 나 혼자서 떠나게 된 기차 여행.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같이 가는 것도 아닌, 내가 그만두면 끝나는 일. 오로지 나 자신과의 약속 때문에 떠나는 여행이라니. 여행을 떠난다고 해서 뭔가 큰 깨달음을 얻게 되리라는 순진한 기대 같은 것은 하지 않았기에 더욱 기분이 묘했다. 말하자면 아무 효용도 없는 짓을 꽤 큰돈을 들여서 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 기차를 타고 가족들과도 가본 적 없는 낯선 땅으로 내려갔다. 어느새 비구름은 저 멀리 사라지고 푸른 하늘이 나타났다.
나의 첫 여행지는 담양 죽녹원. 평일이라 사람이 없었다. 빽빽하게 자란 그 대나무 숲 속에 나 혼자 서 있었다. 혼자 여행하면 어떤 느낌일지 너무 궁금했는데, 워낙 혼자 자취했던 경력이 길었던 탓인지 그저 평소보다 조금 더 큰 방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방 안에는 죽녹원도 있었고, 아스팔트 길도 있었고, 하늘도 있었다. 아늑하고 고요하고 익숙했다.
그래서 인생샷을 남기고 싶었던 거였다. 손에 바리바리 짐을 든 채로 셀카봉에 핸드폰을 꽂으려 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그만 핸드폰을 돌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 오르지도 않고 돌바닥에 넙죽 엎드려 있는 모양새에 느낌이 싸했다. 그런데 역시나, 핸드폰이 박살 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도 그땐 핸드폰 뒷면만 박살 난 덕에 화면은 잘 들어왔더랬다. 그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런데 그걸 또 한 번 더 떨어트리고 말았다. 이번에는 담양에서 광주송정역으로 향하는 길에서였다. 핸드폰은 청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었고, 나는 무릎이 아팠던 탓에 캐리어를 든 채로 옆으로 조심조심 버스 계단을 내려왔는데 그만 주머니 속에 있던 핸드폰이 밖으로 밀려 아스팔트 바닥에 툭 떨어지고 말았다. 설마. 조심스레 핸드폰을 집어 들었으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핸드폰은 그대로 이승을 하직하고 말았다.
그때 내가 있었던 곳은 연고지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광주였다. 그날은 당장에 당일치기로 순천을 들렀다가 곧바로 부산으로 가서 사촌오빠를 만나야 하는 날이었다. 그 말인즉슨, 이제 곧 순천행 기차를 타야 한다는 거였다. 문제는 내일로 기차 티켓은 모바일로만 존재하고 있었고, 역무원조차 그 모바일 티켓을 출력하거나 내 좌석이 몇 번인지를 확인할 수 없었다는 데에 있었다. 설령 어찌어찌 순천까지 갔다고 해도 문제였다. 그다음 행선지인 부산역까지는 고속버스를 타고 가야 했으나 대체 고속버스터미널까지 어떤 경로로 가야 하는 것인지, 내 좌석은 몇 번인지 핸드폰 없이 그 낯선 땅에서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으나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일단 내 지갑을 확인했다. 다행히 나는 삼성페이를 과신하지 않고 내 신분증과 실물 카드를 잘 챙겨 오는 멋진 어른이었다. 일단 돈은 있었으니 한 시름 놓였다. 그래도 내가 누구던가. 덜렁대는데 이골이 난 본 투 비 덜렁이 아니던가. 20년 넘게 덜렁이로 살면서 이와 비슷한 일을 수없이 겪었던 바, 이젠 하늘이 무너져도 살아날 구멍정도는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일단 최악을 상상했다. 최악의 경우라고 해봤자 모든 일정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티켓을 끊는 일일 뿐이었다. 물론 엄마아빠에게 한동안 잔소리를 들을 테고 난 꽤나 주눅이 들고 말겠지만 그래도 아주 최악의 상황은 아니지 않던가. 그렇게 생각하니 힘을 낼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했다. 우선 순천행 기차는 빠르게 포기했다. 대신 그다음 행선지인 부산역으로 가는 기차표를 새로 끊었다. 그다음, 부산에서 만날 사촌오빠와 연락할 방법이 필요했다. 문제는 내가 사촌오빠의 번호를 외우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안내 데스크 직원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래도 가족들의 번호는 외우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를 기꺼이 받은 아빠 덕분에 사촌오빠의 전화번호도 간신히 알아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사촌오빠에게 내 상황을 이래저래 알린 후, 약속시간과 장소를 다시 정했다.
그 후 나는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핸드폰도 바꿨다. 캐리어를 끌고 일단 역을 벗어나 발길이 닿는 대로 걸으며 가게 사장님들에게 핸드폰 대리점이 어디 있느냐 물은 덕분이었다. 그렇게 뜻하지 않게 광주에서 핸드폰을 바꾼 덕분에 나머지 여행 일정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좀 다사다난하기는 했지만 이런 식의 일처리 방법은 앞으로의 내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실수했을 때 대처 방법:
1. 정신을 똑바로 차린다.
2. 최악을 상상해 보고 이 정도면 괜찮다고 다독인다.
3.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빨리 실천한다.
물론 그 일로 우리 엄마아빠는 무척 심란해하셨다. 자기 딸이 이렇게 덜렁이인 사실이 어찌 걱정스럽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 어쩌겠는가. 내 성격이 이렇게 굳어져버린 것을. 결국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부족한 대로 살아가는 방법이라도 익히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기술을 익히는 것이야말로 내게 있어서는 더없이 중요한 생존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