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프롤로그
2024. 12. 30
벌써 2024년의 끝자락이라니! 시간 참 빠르군.
개인적으로도 다사다난했던 한 해.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지만 경험도 많이 생겼고 새로운 취미도 갖게 되었던 한 해. 직장인으로서는 더 이상 신입이라 불릴 수 없는 연차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난 여전히 서툴고 두려운 게 많은데도)
올해로 난 마리모 집사 7년 차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7년 차라니. 무릇 어떤 분야에 있어 7년 차가 되었다고 하면 스스로도 그 분야에서 제법 전문적인 지식을 갖췄다 자신하게 되는 법. 하지만 직장인으로 치면 무능한 상사라고 해야 할까. 마리모를 위해 제대로 일한 적이 없어 전문 마리모 집사라고 불리기 민망할 정도의 마리모 지식을 갖고 있는 나에게, 어느 날 갑작스러운 위기가 찾아오고야 말았다.
때는 2024년 연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난 여느 때처럼 본가에 들러 습관적으로 마리모 어항에 물을 갈아주고 난 뒤 서울로 올라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왠지 모를 쎄한 느낌에 새삼 마리모를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그런데...
마... 리모....?
허연 실타래를 휘감은 듯한 모습... 이게 정상이 맞나...?
왜 지금껏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지?
놀랍게도 그 당시 난, 어쨌든 몸집이 불어나긴 했으니까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겨울이라 색이 연한 거지 여름만 되어 햇빛을 받으면, 하얀 털이 다시 원래의 파릇파릇한 색깔로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이런 무지한 녀석 같으니라고. 지금껏 혼자서 잘 자라왔으니 앞으로도 알아서 잘 자랄 거라는 안일함이 마리모를 이 지경까지 방치시킨 셈이었다. 아무리 녹조류와 같은 미물이라 할지라도 어찌 되었건 한 생명을 책임지는 자에게는 그만한 책임감과 경각심이 필수 덕목이었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진정으로 깨닫고 말았다.
뒤늦게 마리모의 상태에 대해 이리저리 검색을 해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마리모가 하얀색으로 변했다는 것이 곧 마리모 죽음을 뜻한다니, 이럴 수가!
순간 지금껏 마리모들과 함께해 왔던 7년여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마리모와 함께 웃고 울던 나날들... 같은 건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내 인생을 사느라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매달 그냥 무미건조하게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던 녀석들이 생각났고, 그 노력이 아까웠다. 나름 살아 있으려고 열심히 버텨왔을 텐데...
내 일상에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한 적 없는 무난한 녀석들이지만, 그래도 막상 그런 녀석들이 내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그건 그것대로 일상의 위기가 되었다. 그래. 이렇게 마리모를 보낼 순 없다. 무조건 살려야 한다!
마리모를 살리기 위해 일단 녀석들을 물 밖으로 꺼내 보았다. 물 밖에 두니 생각보다 허연 부분들이 잘 보이지는 않는다. 저런 매생이국 같은 실타래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했던 거였을까? 몸집이 커진 만큼 물도 더 잘 갈아주고 먹이도 더 잘 줬어야 하는 거였을까? 분명 자라온 환경은 그 자리 그대로 똑같았는데...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아직까지도 알 수 없다.
휴지 심판대에 올려놓은 마둥이, 막시무스, 수세미.
물이 마르니 확실히 허연 것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신기한 건 막시무스도 나름 이끼 같은 걸 몸에 둘렀다고 겉면이 허옇게 되어 있었다는 거였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하얀 부분들은 이미 다 죽은 녀석들이라고, 그러니 속에 있는 멀쩡한 녀석들을 살리려면 하얀 건 다 잘라버려야 한다는데... 막상 자르려고 하니 쉽게 손이 가진 않았다. 예전에 막시무스의 진위여부를 판독할 때도 그렇게까지 잘라버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하지만! 결국 손톱 자르듯 숭덩숭덩 잘라버린 마리모들. 저만큼의 몸집을 불리기 위해 쌓아왔던 시간의 겹들이 다 무위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뭐 기왕 이렇게 된 거, 시원하게 이발했다 셈 치고 새 출발 하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수밖에.
그렇게 재탄생한 녀석들!
마둥이는 반듯한 원기둥에서 삐뚤빼뚤한 원기둥이 되어버렸고, 막시무스는 찌그러진 호빵같이 되어버렸고 수세미는 더 이상 원형이라 불릴 수 없게 되어버렸다. 어찌 보면 짱구 얼굴 같기도 하다. 오히려 반듯한 것보다 더 매력 있어졌다. 제멋대로인 도형이 되어 버린 거다.
마리모 살리기 프로젝트의 마지막 절차, 길이를 재보았다.
마둥이 1.7cm
막시무스 0.6cm
수세미는 1.5cm
묵은 때를 싹 벗겨냈으니 다시 열심히 살아갈 수 있겠지.
그렇게 마리모 삭발식을 모두 마친 뒤부터, 나도 본가를 조금 더 자주 왔다 갔다 하면서 물도 더 잘 갈아주려고 노력했다. 물론 적어도 몇 개월 동안은 그랬다는 거다. 결국 그 몇 개월이 지나자 다시 원래 패턴으로 돌아와 가끔씩만 본가에 내려가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다. 결국 나도 직장에서 내 몸 하나 건사하는 데에 열과 성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2024 연말.
본가로 내려가 마리모들의 모습을 촬영했다.
과연 그 모습은....?
두둥
짜잔! 보이시는가!? 저 파릇파릇한 모습이!
마리모 죽음을 걱정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정말 1년 동안 열심히 살아주었다.
녀석들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또다시 휴지 심판대에 녀석들을 올려놓아보았다.
포송포송. 면면들이 화려하군.
제일 잘 자란 것 같은 마둥이. 깎아지른 스포츠머리에서 밤송이머리가 되었다.
수세미도 찌그러진 대로 잘 자라주었고
막시무스는... 이젠 너무 쪼그라들어서 어항에 있는 돌과 분간이 안 될 정도다ㅠ
나도 물을 갈아줄 때마다 막시무스를 찾기 위해 온 집중을 다 해야 했다. 막시무스는 잘라내지 말았어야 했나... 하는 후회를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 하얀 이끼를 잘라주지 않아 막시무스 전체가 죽은 이끼들로 뒤덮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항의 돌 크기일지라도 파릇파릇 살아가는 게 더 나은 삶일 거라고 생각한다.
마둥이 1.7 -> 2.0
수세미 1.5 -> 1.5 (근데 이건 어딜 어떻게 재느냐에 따라 다른 듯. 일단 포송포송하게 자라긴 함)
막시무스 0.6 -> 0.5 (확실히 크기가 더 줄긴 한 듯)
이로써 마리모 살리기 프로젝트는 대성공!
아픈 마리모들을 다시 건강하게 살릴 수 있었던 비법은 아무래도 7년 차의 경력에 빛나는 마리모 집사의 전문적인 손길... 때문이 아니라 그냥 연초에 확실히 문제가 되는 부분들을 과감히 잘라주었던 덕분이었던 것 같다. 그 후로 내가 딱히 뭘 더 해준 것도 없으니... 결국 버릴 부분은 아까워하지 말고 버리는 게 맞다.
마지막으로 마돌이들 단체 샷을 찍어주었다. 어벙한 사람 표정 같기도 한 걸. 파릇파릇한 크리스마스트리 같기도 하다. 1년간 이렇게 자라주느라 수고한 마돌이들이다.
집에 남아도는 인형들 (아빠가 가져온 출처불명의 인형들)로 마돌이들의 어항 주변을 세팅해 주었다. 앞으로도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해 주기를! 그러면 난 내년에도 본가에 내려갈 때마다 당연하다듯이 마리모의 물을 갈아주게 될 것이다.
당시 실제 포스팅과 댓글 반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