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좀 운동 쪽으로는 그만하면 안 되니? 벌써 3년이 다 되어가잖니?"
엄마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섞여 있었다. 매일 새벽같이 나가서 트랙을 도는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이 어떨지,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엄마, 수영은 4등에 그쳤지만, 이건 4등에 그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엄마 앞에서 감정적으로 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충분히 실망을 안겨드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좋아, 네 목표는 뭐야?"
엄마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 한숨 속에는 체념과 걱정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최종 목표는 당연 국가대표지만, 지금은 준비하는 대회에서 1등을 하고 싶어요."
"3등도 못했던 네가? 1등을 목표로 한다고?"
엄마의 말이 가슴에 박혔다. 사실이었다. 나는 아직까지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최선? 최선이 항상 전부일까? 수영보다 더 재능이 필요한 게 달리기야."
"이모부 때문에 그래요?"
그 순간 엄마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실 집안에 있다는 육상인은 엄마도 아니고, 아빠도 아니다. 이모부다. 엄마는 이모부 이야기를 끔찍이 싫어한다.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혐오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이모부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나와 같은 꿈을 꾸었던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이... 이모부 얘기는 하지 마. 그만큼 미친 사람이 없는데, 지금 뭐 하는 줄 아니? 직장인 해, 직장인. 그것도 대기업도 아니고... 결혼도 못하고 살고 있어."
엄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떨림 속에는 분노와 실망, 그리고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엄마... 난 이모부랑은 다를 거예요."
"재혁이만큼 달리기에 미쳤던 사람도 없는데, 달리기를 연습하다가 사고가 났어. 정말 미친 듯이 연습했던 사람이 그래."
엄마의 목소리가 더욱 떨렸다. 이모부 재혁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집의 금기였다. 하지만 오늘은 엄마가 직접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근데 너도 그렇게 될까 봐 나는 두려워. 솔직히 네가 그냥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평범. 그 단어가 내 가슴을 짓눌렀다. 평범이 가능할까. 남들이 공부할 때 나는 수영을 하고, 육상을 했다. 그게 도합 3년이 되어간다. 나는 중3이다. 설령 고등학교를 간다고 쳐도, 도저히 누군가를 따라잡을 성적이 못 된다. 그 정도 실력을 쌓지 못했다.
지방대를 간다고 치자. 뭘 배워야 할지도 정하지 않은 자가 대학에 가면 처한 현실은 불 보듯 뻔하다. 공부 부적응자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 나는 지금도 반 41명 중 38등이다. 뒤에서 3등. 나머지는 그냥 다 찍고 자는 애들이다. 난 그래도 다 찍고 자지는 않으니까, 그나마 꼴찌는 안 하는 듯하다.
하지만 트랙을 달릴 때만큼은 달랐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다리가 후들거려도, 결승선을 향해 내달릴 때만큼은 내가 뒤처진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그 순간만큼은 1등도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 느낌은 마치 날아오르는 듯했다. 세상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고, 내가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었다.
"엄마, 엄마가 그렇게 나를 못 믿는다면, 내 열심을 증명하기 위해 난 체고에 가겠어요."
"체... 체고? 제발 평범하게 살아... 평범하게..."
엄마의 목소리에 절망이 섞였다. 그때 마침 아빠가 회사에서 돌아오셨다.
아빠는 항상 늦은 시간에 돌아오시지만, 오늘따라 타이밍이 절묘했다.
"체고를 간다고?"
아빠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가라... 근데 체고를 목표로 하려면 중학교를 옮겨야 한다."
"이 산골 중학교에서 주변에 체고가 있니? 기왕 다니려면 체고, 서울로 다녀."
"아빠는 할아버지 도움으로 결국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를 갔어. 난 자식이 좀 더 좋은 인프라를 경험했으면 좋겠다."
아빠의 말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적어도 한 사람은 나를 믿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중학교 이야기를 조금 하자. 우리 중학교는 지방에 있고, 버스도 잘 안 다닌다. 중학교의 이름은 '감천' 중학교. 지성이면 감천이다 할 때, 그 감천 맞다. 공기 하나는 좋다. 밤에도 도시와 다르게 별천지다.
때론 그 별을 보며 달릴 때도 있다. "오늘도 저 별을 보면서 달릴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달릴 때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별빛이 내 발걸음을 비춰주고, 시원한 밤공기가 내 폐를 가득 채워줄 때의 그 느낌을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었다.
사실 난 친구가 별로 없다. 전교생이 120명도 안 되는 작은 학교에서도 나는 늘 혼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전학을 가자고 했을 때 마음이 사실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친구라곤 재성이 밖에 없는데, 하지만 재성이한테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난 친구들에게 잘 다가가는 편은 아니다. 사람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면, 마음이 좀 찌그러진 깡통이 되는 느낌이다. 요즘 말로, I라고 해야 되나? 그중에서도 극 I이다. 차라리 어른이 편하다. 나는 오히려 동갑내기 친구들이 불편하다. 같은 나이인데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인혁아?"
재성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쉬는 시간이 되어 있었고, 재성이가 내 앞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얼굴인데?"
내 얼굴의 낯빛은 사실 아침에는 그다지 좋지 못하다. 뛰지 않는 아침 시간에는 그다지 좋은 낯빛은 아니었다. 어두운 얼굴, 마치 밤의 그림자를 보는 듯한 얼굴. 나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혁아, 솔직히 말할게, 너는 뛸 때나, 육상 얘기를 할 때 말고는 요즘 표정이 안 좋아"
"나도 알긴 아는데, 그게 요즘 고쳐지지 않아"
정말 그랬다. 달리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만 내 눈이 살아났다. 다른 시간에는 마치 껍데기만 남은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요즘 무슨 고민 있어?"
고민을 솔직하게 토할까? 토하지 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내게 먼저 다가온 친구를 내가 먼저 거부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나는 인간의 기본 예의를 아는 사람이다. 인간의 기본 예의라면 이래선 안된다. 내게 먼저 다가온 선의를 보인 사람에게,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싶다.
그래도 솔직하게 내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재성이라면 들어주지 않을까.
"사실, 나 체고를 준비하기 위해서, 전학을 가고 싶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재성이의 표정이 놀람에서 아쉬움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흠... 너와 헤어짐은 아쉽긴 하지만... 꿈을 위해서라면, 그게 맞겠지?"
"나랑 헤어지는 거 안 아쉬워?"
"아쉽지. 너 같은 친구도 없는데, 너같이 재밌는 애도 없는데?"
"내가 재밌어?"
정말 의외였다. 나는 늘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난 너랑 대화할 때가 제일 신나고 즐거운데?"
몰랐다. 재성이가 나를 좋은 친구로 생각하는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나를 아끼는 줄은 몰랐다. 재성이가 나를 아낌에 비해, 나는 재성이를 아끼지 못한다. 재성이의 사랑이 100이라 치면, 나는 10도 채워주지 못하는 듯하다.
"재성아, 고마워. 네가 이렇게 생각해 줄 줄 몰랐어."
내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인혁아, 너도 좋은 친구야. 그냥 표현을 잘 못할 뿐이지."
재성이는 엄마보다도 나를 아끼는 듯하다. 낳아주신 엄마와의 비교가 과연 적절한 것인가까진 생각하지 않겠다. 적어도 내가 만난 재성이 그리고 엄마를 보면 그렇다.
"네가 체고에 가서 성공하면, 나도 자랑스러울 거야. 우리 인혁이가 국가대표 된다고 하면, 내가 친구라고 자랑하고 다닐 거야."
재성이의 말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런 친구를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 갑자기 아쉬워졌다. 하지만 꿈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날 밤, 나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삶에 대해 생각했다.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는 반드시 성공해서 재성이의 자랑스러운 친구가 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