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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뚜로 빼뚜로 May 03. 2021

고등학생 이상 관람가

라떼는 말이야! <타이타닉>(1997)

  서툰 것 투성이었던 시기에 ‘처음’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방어막이 되어주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수줍은 변명이 점점 무색해지기 시작했을 즈음인가, 나는 괜히 심술이 났다.  

 ‘첫 만남, 첫 친구, 첫눈, 첫 등교, 첫 졸업, 첫사랑, 첫 섹스...’ 이처럼 처음이기에 미화되기 십상인 경험들을 끄집어내었다. 그리고 무엇이든 첫 순간의 기억은 퇴색되기 마련이며, 그 의미 역시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어있다는 불만을 토로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있다. 너무나 기억하고 싶지만 돌이키지 못하는 원초적인 경험의 순간들.  

        ‘처음 맡은 냄새, 처음 느낀 숨결, 처음 맛본 음식과 식감, 처음 눈물이 맺힌 순간...’     

 첫 순간의 기억은 반복되는 일상이 쌓여갈수록 멀어진다. 이들 중 그 어느 것도 회상할 수 없는 나의 시간이 야속하다. 간혹 ‘처음’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 아마도 한정된 기억에 의존해 불러들인 그 순간에 대한 불신이 어디엔가 자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방점이라도 되는 듯 처음으로 나를 되돌리는 것이 항상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감각을 발견했던 어렴풋한 순간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우리 남매에게는 한 주를 잘 보내고 나면 포상처럼 주어지는 TV 시청 시간이 있었다. 당시에는 주말 밤마다 지상파 방송에서 영화를 방영해주곤 했는데, 야속하게도 방송사별로 영화를 시작하는 시간이 얼추 비슷했다. 우리는 그 주를 완벽하게 마무리할 딱 한 편의 영화를 고르기 위해 주말마다 조간신문을 받아 들고 맨 뒷장의 TV 편성표를 펼쳤다. 모나미 볼펜을 쥐고 엎드려 사뭇 진지하게 고심하던 추억은 신문 잉크 냄새와 함께 여전히 생생하다. 쏟아지는 콘텐츠를 한참 쓸어내리다 결국 한 편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잠드는 요즈음, 그때의 나른한 주말 오전 향기가 더욱 그리워지기도 한다.            


  영화에는 한없이 관대했던 엄마와 b급 무비 마니아였던 아빠 덕분에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수많은 영화를 볼 수 있었다.(놀랍게도 드라마는 한 편도 보지 못했지만) 그러한 분위기 아래서 당시에는 규제가 그리 엄격하지 않았던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의 영화도 나의 리스트에 포함될 수 있었다.      

 

 또래보다 키가 컸던 학생이었던 나는 엄마와 함께 마을버스를 타고 토요일 조조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향했다.

      

     “어.. 이거 고등학생 이상 가능한데요?”

     “부모님 동반이면 괜찮지 않나요? 아이가 성숙해서...”     

     “다음부턴 안 됩니다. 오늘만 들여보내드릴게요.”     


  무엇이 괜찮은지는 몰랐지만, 마냥 극장이 좋았던 나는 진지한 고학년인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본 영화가 바로 타이타닉이다. 그렇다. 나의 첫 19금 영화에 관하여 쓰려니 이렇게 서론이 길어진다. 당시 영화관을 나오며 영화가 어땠냐는 엄마의 질문에 나는 잭이 불쌍하다고 얼버무렸다. 그리고 초록색 바닥을 향해 고개를 떨구고, 괜스레 고무바닥을 지익-지익- 긁었다. 분명 나에게 처음으로 느껴진 감각이었기에 무언가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생긴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스크린을 꽉 채운 유리창에 가득한 습기.

 떨어지는 손바닥과 차창 사이의 마찰음.      


  시각과 청각으로 알 수 없는 새로운 감각이 몰려들어 숨을 죽였다. 얼굴 저 안쪽 언저리, 귓불 아래부터 턱 밑까지 이어지는 신경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어딘가가 살살 간지러웠는데, 한참을 아무리 긁어도 도저히 이 간지럼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랫배가 울룩불룩 따뜻했다. 이후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나의 첫-야릇함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영화관을 나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그 생소하고 미성숙한 감각에 대한 경계심은 곧 사라졌다.          




<그림 1> https://twitter.com/JimCameron/status/1100179620027121664
<그림 2>“6 possible reasons why Rose's hand slid down that foggy window in Titanic” (Her.ie)

  이렇게 나의 ‘첫-야릇함’의 기억은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 감독의 영화 <타이타닉>으로 시작했다. 타이타닉을 두고 고작 야릇함이라니! 하며 타박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기념비적인 쇼트가 여전히 영화 팬들 사이에 종종 회자되는 것으로 당시를 변명해야겠다. [로즈의 손자욱이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보존되어 있다는 카메론 감독의 트윗에 환호하는 고인물들! <그림 1> + “6 possible reasons why Rose's hand slid down that foggy window in Titanic” 이 장면을 아주 진지하게 고찰한 -날조된- 칼럼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차 안에 아주 신경 쓰이는 파리가 한 마리 있었을 수도 있다! <그림 2>]

 

  물론 디카프리오의 눈빛과 윈슬렛의 에너지가 폭발했던 두 주인공의 케미가 가장 큰 몫을 차지하겠지만, 조금 다른 각도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왜 바로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짜릿한 긴장감을 느꼈을까?        


  삶을 온전히 향유하지 못한 채 곧이라도 숨이 멎을 것만 같은 몰락한 귀족 가문의 로즈 그리고 거침없이 가래침을 뱉어내지만 아슬아슬하게 온전한 삶을 영유하는 잭. 영화는 신분의 한계를 넘는 두 남녀의 사랑이라는 클리셰를 반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적 공간인 타이타닉호라는 소우주의 존재는 이들의 모습을 더욱 간절하게 그리고 더 나아가 비극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다.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이 영화 속 타이타닉호는 서사의 공간적 배경일뿐 아니라 또 다른 화자로 제시된다. 가슴 아픈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로즈의 회상을 통해 현재와 과거의 시공간을 넘나 든다. 타이타닉 내부로 들어가는 탐사선이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심해의 공간을 넘나들듯이 영화라는 서사 구조 속 로즈의 이야기는 관객을 타이타닉에 동승하도록 이끈다.


<그림 3>

  항구 옆 허름한 술집 도박판에서 미국행 티켓을 따내는 잭과 빽빽하게 항구를 채운 사람들을 가르며 들어오는 고급 차량 안의 부자유한 로즈의 모습은 이들 사이의 계급차를 극명히 드러낸다. 그리고 이들의 신분적 배경은 곧 그들을 속박하는 사회적 시선으로 전이된다. "평생 어림도 없는" 상대인 갑판 위의 로즈를 발견하는 잭의 시선은 층층이 나뉜 공간의 구조를 통해 이러한 사회적 현실을 형상화한다. 중간층의 로즈는 1등 객실 시민의 생활도 혹은 그 반대의 삶도 선택할 수 없는 듯 보인다. <그림 3>


  대양을 가르는 타이타닉, 이 폐쇄된 공간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자 무시무시한 고립이라고 할 수 있다. 전속력을 내는 타이타닉의 보일러실에서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손들이 거대한 터빈을 끊임없이 돌리며 지하 세계의 에너지를 폭발시킨다. 이를 원동력으로 부유하는, 이동하는 세상의 시작점에 아슬아슬하게 선 잭은 그 순간만큼은 그 세계를 지배한다. <그림 4>  

 

<좌: 그림4>     <우:그림5>


 이들의 경계 넘기가 시작되는 갑판은 일종의 중간지대라고 할 수 있다. 유일하게 가능한 자기 의지로 삶을 던짐으로써 자신을 질식시키는 공간에서 벗어나려는 로즈의 선택 앞에 잭의 손길은 세상 끝에 그녀를 유일하게 구원하는 존재다. 타이타닉은 이들의 시작이자 끝이 맞닿은 지점이자 새로운 세계인 것이다. <그림 5>

<그림 6>

  1등석과 3등석, 갑판 아래 엔진실까지 잭과 로즈는 우리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장벽과 금기를 넘나 든다. 그리고 카메라는 이들의 숨 가쁜 숨바꼭질을 그리고 그 찰나의 자유를 경쾌하게 좇는다. <그림 6> 그리고 이들이 경계를 넘나드는 모든 곳에 관객은 함께 존재한다. 물리적으로 열어야 하는 수많은 문들은 이들의 신분 격차라는 사회적 거리를 대신한다.


 타이타닉의 공간은 개개인을 잠식하는 사회의 속박을 고스란히 이동 중인 상태로 옮겨놓았다. 새로운 계급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들을 집요하게 뒤쫓는 날 선 시선의 존재는 여전히 유효하다. 잭과 로즈를 따라 함께 문을 열고 질주하던 관객은 그들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그들만의 판타지적 공간의 문이 닫히며 숨을 죽인다. 둘만의 숨결로 가득 찬 한 뼘의 자유가 마침내 우리 눈 앞에 드러내는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마침내 그들의 경계 넘기가 완성되는 것이다. 미로처럼 뒤얽힌 폐쇄된 공간을 넘나든 끝에 이들에게 단 한번 주어진 정지된 시간은 서로의 숨결로 가득한 이 순간을 더욱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나의 '첫-야릇함'은 그들의 경계 넘기가 마침내 이루어진 순간에 탄식하듯 흘러나온 카타르시스가 아니었을까.

 


 * 1997년작 타이타닉은 현재 한국에서는 15세 관람가, 미국에서는 PG-13(:Parents strongly cautioned. Some material may be inappropriate for children under 13.)으로 부모의 지도 하에 13세 이상 관람가로 분류되어 있다.      


 * 당시에도 초등학생이 부모님과 동반한다 하더라도 고등학교 관람 불가 영화를 관람하기는 불가능했지만, (운이 좋게도?) 규제가 심하지 않았던 개인 극장들에서 "다음부터는 안 됩니다."라는 말과 함께 종종 관람이 가능했던 개인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한 글임을 밝힌다.        


by. FernWeh.

영화적 공간을 통해  곳을 가까이에서 그리고 가까운 곳을 멀리서 그리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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