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 리뷰
최근, 나를 낳아준 여인으로부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유치원생일 때, 혼자서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해 그 앞에서 엉엉 울어댔다는 에피소드였다. 그 말을 듣고 웃음이 빵 터졌는데, 이야기를 듣기 직전까지 사소한 일에도 머리를 싸매고 끙끙대는 예민한 나의 성격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진지하게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답은 간단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한다고. 나는 천성이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MBTI 유형으로 농담 반 진담 반 추가 설명해보자면, 매 검사마다 INFP가 나오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 잔다르크형이라고, 생각만 많고 현실감각과 실행력은 떨어지는 이상주의자...
어쨌든 이런 겁 많은 올챙이도 용감하고 담대한 멋진 개구리가 되는 꿈을 꾸고는 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면 창 밖에 보이는 어두운 수풀을 헤쳐 걷는 모험가나 영웅이 된 상상을 하곤 했는데, 그런 상상을 하는 날이면 가슴이 쿵쿵 뛰고 혈관에 피가 팍팍 도는 게 살 맛이 났다. 나의 이 은밀한 욕망에 처음으로 불을 지핀 인물과의 만남이 떠오른다. 아, 나우시카! 나의 우상!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생 시절, 아파트 단지 내에서 주민을 대상으로 개최한 영화 상영회에서였다.
영화 상영회는 공용 놀이터 옆에 있는 작은 공터에서 진행되었으며,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해리포터> 시리즈, <반지의 제왕> 시리즈 혹은 아이가 주인공인 <천국의 아이들>과 같은 영화를 틀어주고는 했다. 하얀 천 스크린에 비친 영상이 잘 보일 정도의 어둠이 내리면,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은 돗자리를 깔고 아이들은 동사무소에서 나눠준 막대사탕을 쭙쭙 빨며 영화를 관람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상영되던 여름밤도 마찬가지였다.
소형 비행기 '메베'를 타고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는 단발머리 소녀, 나우시카. 그녀는 뛰어난 비행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여기저기서 발사되는 탄알도 요리조리 피하고, 곤경에 처한 사람이나 오무를 구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구름을 뚫고 성층권까지 날아다닌다. 추락하는 비행기에 탄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비행기를 발로 조종하며 짐짓 미소를 지어 보이는 모습은 정말 압권이다. (그런데 나우시카의 펄럭거리는 치마 속이 보이는 샷을 영화는 왜 이리 많이 보여줄까? 의문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속 세계는 거대 산업문명이 붕괴된 이후, 녹과 금속조각으로 황폐해진 지구를 균류가 장악한 세계이다. 포자식물이 숲을 이룬, 썩은 바다 '부해'는 균이 내뿜는 치명적인 독성이 가득하고 거대한 곤충들로 득실거린다. 위 포스터에 그려진 빨간 눈을 가진 생명체는 바로 그 부해를 지키는 대표적인 곤충, 오무이다.
점점 영역을 확장하는 부해를 피해 인간들은 여러 곳에 각각의 공동체 - 바람계곡, 토르메키아, 페지테 국 - 을 이루어 살아간다. 그들은 이 유해한 자연에 대해 각기 다른 태도를 취한다. 토르메키아 출신 공주는 부해의 존재가 인류에게 명백한 해를 가한다 생각한다. 따라서 인류의 문명을 다시 세우기 위해, 국가가 가진 군사력과 비밀병기로 부해의 모든 것을 불태우려 한다. 페지테 국의 남성 지도자들은 토르메키아에 대한 국가적 복수, 학살을 위해 부해에 사는 '오무' 유충을 착취한다. 바닷바람 덕분에 부해의 영향을 덜 받을 수 있었던 바람계곡의 사람들은 다만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토르메키아와 페지테 국, 오무. 이 거대한 세 고래의 대치에 새우등 터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우시카만이 부해와 부해에 사는 존재- 곰팡이, 곤충-를 두려움과 혐오가 섞이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유일한 존재다. 그녀만이 부해가 사실 인간들이 오염시킨 지구를 정화시켜 흙과 물을 깨끗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문제의 본질을 볼 수 있는 현명함,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자애로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발로 비행기를 조종하기까지 하는 대담함, 사랑하는 존재를 위한 자기희생적 태도까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중재자가 되어 모두를 구원하는 나우시카의 영웅적 면모는 어린아이의 눈에는 너무나 훌륭한 모습이었다. 따라서 초등학생 시절의 나는 나우시카를 우상으로 삼기에 이른다.
과거를 회상하는 시점에서, 나는 영화가 가진 놀랍고도 무서운 힘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영화가 가진 은밀한 '신화', '환상'으로서의 힘이다. 관객은 영화 속 서사를 따라가다, 종종 자신과 동일시할 영화 속 대상을 찾고는 한다. 대부분 그 대상은 주인공이 되며, 우리는 주인공의 삶과 여정을 나의 일처럼 응원한다.
영화 이론가인 테레사 드 로레티스는 영화에서 이미지로 재현된 여성과 역사적 존재로서의 여성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 말을 확장하자면, 영화에서 재현된 인간의 모습과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작자, 관람객, 분석가 모두 영화에 자신의 현실을 투영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현실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그리는 세계는 너무나 그럴듯하여 관객은 영화에 자신을 대입하기에 이른다.
나 또한 그중 한 명이었다. 영웅 캐릭터인 '나우시카'를 우상이자 이상적 미래상으로 정했고, 그녀가 하는 모든 행위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겁 많고 소심한 현재의 모습에서 탈피하여 그녀처럼 현명할 것을, 자애로울 것을, 담대할 것을, 가치를 위해서라면 희생적일 것을 스스로에게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화에 영향을 받는 것은 초등학생 관람객뿐만이 아니다. 영화 속 나우시카가 사는 세계에도 전설이 존재한다. 나우시카는 바람계곡의 예언자(왼쪽 사진의 왼쪽 인물)로부터 예전부터 전해온 벽에 그려진 한 남성에 대한 전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예언자는 말한다. "푸른 옷을 입고, 황금벌판에 내려선 자. 잃어버린 대지와의 인연을 다시 맺어 우리를 푸른대지로 인도할 지어다."라고. 그 말을 들은 나우시카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이후 나우시카는 새끼 오무를 고문한 비열한 인간들 때문에 분노로 가득 찬 오무 무리의 앞에, 자신과 새끼 오무를 놓는다. '그만하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그들을 응시한다. 물리적인 힘으로 그들을 막으려는 것이 아닌, 그들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차의 브레이크도 작동 거리가 필요한데, 매섭게 달려오는 오무들도 움직임을 멈추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우시카와 새끼 오무는 치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강한 충격에 하늘로 튕겨져 버린 나우시카를 멀리서 지켜보는 바람계곡의 사람들은 그녀가 죽었을 거라 예상하지만, 매서운 행진을 멈춘 오무들이 그들의 신비한 노란 촉수로 쓰러진 나우시카를 치유한다. 극적으로 부활한 나우시카는 그녀가 이전에 들었던 전설처럼, 파란 옷을 입고서 노란 촉수로 이루어진 황금벌판을 걷는다.
초등학생의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생각했다. '와우. 그 전설의 주인공이 사실 나우시카였군!' 그러나 어른이 되어 재차 관람하였을 때에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전설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 나우시카가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재현한 것은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나우시카의 현실적인 결말(왼) / 영화가 주장하는 나우시카의 신화적인 결말(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주인공은 나우시카가 아니라, 신화다. 대의를 위한 희생의 신화. 영화 속 나우시카는 벽화를 통해 자신에게 전해진 신화를 재현하고, 그러한 그녀의 이미지를 바라보는 초등학생에게는 그녀가 재현하는 자기희생의 신화가 입력된다. 언젠가 재현될 수 있기를 기다리며.
상상해보자. 미친 듯이 달리는 오무 무리 앞에 선 나우시카가 살아나지 못했다면?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기기 위해서, 한 소녀와 한 마리 곤충의 희생에 대한 대가 - 목숨 - 를 숨긴 것이라면? 후대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희생의 이야기가 신화로서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위해서 현실적인 결말을 숨겨두었다면? 나우시카가 자기희생의 결과로 죽음을 얻었다면, 초등학생 시절의 겁 많은 올챙이는 아마 쉬이 그녀를 우상으로 삼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 두려우니까.
이 글을 완성하던 날, 산책하다가 호수 위에 둥둥 떠있는 죽은 물고기를 보았다. 반쯤 떠있는 물고기의 몸통 위로 네다섯 마리의 파리들이 그것이 마치 언덕인 양 돌아다니고 있었다. 부패가 이미 진행되고 있는 물고기의 하얗게 불어버린 눈과 꼬리를 보며, 물고기가 물속을 헤엄치던 과거의 날을 상상해보았다. 그의 죽음에 정해진 이유는 없어 보였다.
초등학생 시절 나에게는 희생은 참 고귀하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희생은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단어다. 과거 인류가 자연이나 신을 위해 제물로 바쳤던 동물들. 그리고 때때로 인간들까지. 그들의 죽음도 희생이라 불려 왔다. 우리에게 남겨진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희생이라는 단어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단어 아래에 있어야만 하는 생명은 진정으로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그렇게 나에게 주입된 '미화된 자기희생의 신화'는 깨졌다.
바람계곡에 사는 나우시카가 겁 많은 이상주의자의 우상이 아니라, 그냥 하나의 이야기가 되던 밤에.
by B612
영화와 현실 사이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나는 여행자입니다.
어디에 두고 온 아이를 자꾸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이것이 나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