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드 팔마, <Blow out>
얼마 전 종영한 시리즈 <빈센조>의 송중기 얼굴을 넋놓고 보다가 그 드라마적 상황과 현실의 간극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판타지적 영웅물로 점점 전락하는 결말 즈음에, 진실이 끝내 드러나지 않고 사라지던 브라이언 드 팔마의 영화 <Blow out>(1981)이 떠올랐다. 이 영화에는 진실이 드러나 잘잘못이 가려지기는커녕 오히려 진실 따위 깔끔하게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권력의 일방적인 사실 재조작은 생각보다 교묘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실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히치콕과 안토니오니
<Blow out>의 첫 장면은 어설프게 히치콕의 <사이코>의 유명한 샤워씬을 닮은 B급 영화로 시작된다. 영화 안의 B급 영화감독은 영화 효과음 담당 잭 테리(존 트라볼타 분)에게 여자의 비명소리가 더 리얼한 것을 만들어 올 것을 주문한다. B급 영화감독은 히치콕의 훌륭함에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브라이언 드 팔마는 자신이 존경하는 히치콕을 넘을 수 없으며 그에 비하면 자신은 B급 영화감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훌륭한 영화감독을 뛰어넘는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특히 히치콕 같은 넘사벽은 깨기 힘든 벽을 넘어 그냥 클래식이다.
또 이 영화의 제목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 <Blow up>(1966)을 상기시키는데, 우리나라에는 ‘blow up’은 <욕망>으로 ‘blow out’은 <필사의 추적>이라는 영화제목으로 소개되어 상관관계를 찾을 수 없어 보여 안타깝지만, 두 영화의 내용과 서사의 모티브는 제목만큼이나 유사하다. <Blow up>은 한 사진작가가 시체사진을 우연히 찍게 되면서 그 진실에 대해 밝히려고 하자 필름과 사진을 도둑맞아 사실에 대한 증거가 사라지고 그로인해 그 사실 또한 모두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라면, <Blow up>은 미국의 실제 정치 사건을 넌지시 반영시키며 타살의 증거와 증인을 지키기 위해 살인마와의 고군분투하는 영화적 서사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담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두 거장을 흠모하는 마음이 이 한 영화에 직설적으로 드러나 있다. 히치콕이나 안토니오니에 비해 영화의 완성도는 다소 떨어져 보이지만 현실과의 거리는 오히려 더욱 가깝고 그 현실에 던지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아 보인다.
진실이 기록된 증거와 증인
소리를 수집하던 잭 테리는 차 침몰 사건을 목격하게 되는데, 물에 빠진 차 안에 죽은 남자는 당선 유력 후보이며 함께 탄 여자는 그날 누군가의 사주로 그 후보에 접근한 매춘부로 이런 사고가 일어날 줄 몰랐던 희생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사건을 당한 쪽은 후보가 어차피 죽은 마당에 그런 여자의 존재자체가 그 정치가가 담은 당의 이미지에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기기 때문에 사건을 덮으려 하고, 사건을 일으킨 쪽은 이를 교묘히 이용했으며 당연히 살아남은 증인을 없애야했다. 그녀가 살아남은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믿을 수 없어서 함께 도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잭은 사건에 의심을 가지고 녹음했던 현장의 소리와 그 곳에서 누군가 돈을 뜯기 위한 목적으로 찍은 연속 사진들을 맞추어 비교해보면서 단순사고가 아닌 차가 침몰하기 전 총기소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잭은 살인범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그녀를 지키고 사건의 진실을 풀기 위해 살인범을 잡으려고 그녀를 유인책으로 쓰지만 살인범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살인범은 마치 실수처럼 다른 비슷한 여자 몇 명을 죽였는데, 이것는 증인의 죽음이 비슷한 취향의 여자를 노리는 연쇄살인범의 범행으로 보이기 위한 치밀한 작전이었다. 미국의 자유의 날 축제에 그녀는 살인범에 의해 죽게 되고 비명소리만 남긴 채 진짜 사실은 덮히고 연쇄 살인의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된다. 그녀는 정치인들이 짜놓은 판에서 도구처럼 이용되고 목숨을 위협받지만, 진실을 위한 어떠한 확실한 도움도 받지 못한다. 그녀는 자유의 날 성조기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진실은 의미도 힘도 없이 사라진다.
진실은 사라지고 그녀의 비명은 영화 속으로
잭에게 남은 그녀의 리얼한 비명소리는 B급 영화의 리얼한 효과음으로 쓰인다. 사라져버릴 사실을 세상에 남겨놓는 유일한 방법이자 그녀를 지키지 못한 자신을 계속해서 자책하게 할 탁월한 방법이다. 영화가 현실과 닮아 있을 때 우리는 사실적 현실에 눈을 뜸과 동시에 허무함을 느낀다. 현실과 닮은 이 새드엔딩은 거대하고 잔인한 힘 앞에 개인과 진실이 얼마나 약하고 가벼운지 보여준다.
사건이 영화 안의 하나의 소품으로 전락하는 것은 오래된 브라이언 드 팔마의 영화 속 세상이나 지금이나 별 다를게 없다. <빈센조>에는 우리가 겪은 유사한 사건들이 등장하고 실제 언론사들과 정치인, 기업들의 행태들을 비꼬아 반영시키는 등 과감한 시도를 하지만, 사실이 밝혀져도 별로 변하는 것 없는 현실과 그에 익숙한 우리는 전복이나 처벌에 소극적이다. 폭력과 잔인함에 강한 거부감이 있던 심약한 우울증환자마저 마피아 영웅의 권력을 향한 폭력이 속 시원해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사실주의적 영화보다 판타지와 영웅이 필요한 시대를.
진실은 사라진지 오래이거나 애초에 없었나 보다. 진실이나 사실 따위 영화의 소품으로나 쓰이고 사람들은 그에 대해 관심이 없다. 사실이란 어차피 알고 싶은 것만 듣고 만들고 퍼뜨리는 세상의 소문일 뿐이다.
by 융가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