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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뚜로 빼뚜로 Mar 15. 2021

나를 혐오하는 사람을 위하여

영화 <소년 아메드, 2019> 리뷰

by 호모나랜스 


디지털 공간에서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사람, 호모나랜스(Homo narrans)는 아동과 청소년이 주인공인 영화를 즐겨보며 내 속에 아직 자라지 않은 내면 아이의 친구를 찾습니다.


 혐오란, 어떠한 것을 치가 떨리게 싫어하는 것이다. 싫음의 정서를 뛰어넘는 혐오는 개인적인 것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간다. 나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하여 실행할 수 있는 비교적 쉬운 방법은 무언가를 혐오하는 것이다. 나와 내가 혐오하는 대상이 공존할 수 없다는 결론은 역사 속에서 늘 그래 왔듯이 끔찍한 결과로 이어진다.


 누군가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는 명분으로 나를 죽이려고 달려온다면, 나는 그에게 혐오로 맞대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를 혐오한다고 울부짖는 사람이 한 때 내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내가 그를 혐오하지 않은 상태로 기다려 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다큐멘터리 형식의 극영화로 시의 적절한 질문을 던져 온 다르덴 형제의 <소년 아메드>를 나는 이렇게 해석했다.


 영화는 아이와 어른, 어정쩡한 그 사이에 놓인 13세의 혐오 정서를 카메라로 따라가며 보여준다. 왜 아메드는 13살이어야 했을까. 아마도 13세의 혐오 정서는 아직 딱딱하게 굳어버리지 않았다는 믿음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궁금해하고, 관계를 이어나가며 대화하려는 의지들이 13세를 기점으로 점점 감소하고 있는 것일까. 아메드를 향한 의지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그는 응원하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어진 고립 속으로 결국 떨어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메드는 숨을 헐떡이며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른다. 그리고 이네스 선생님을 이슬람교의 교리를 지키지 않은 사람으로 여겨 칼로 찔러 죽이려다 실패하고, 소년 교정시설에 입소한다. 이네스 선생님은 코란과 이맘의 말에 기대어 생활하는 아메드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사람이다. 이네스 선생님은 히잡을 쓰지도 않고, 아메드에게 악수를 청하며, 노래로 코란을 가르치기 때문에 아메드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슬람 율법대로 정해진 하루 일과를 행하는 아메드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 그런 그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게 된 유일한 상황은 루이즈가 자신에게 키스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이다. 교정 시설의 교화 프로그램으로 농장에 가서 실습 교육을 받던 아메드는 비슷한 나이의 친구를 만난다. 자신의 안경을 벗어 빌려주고, 안경을 벗은 얼굴도 자세히 보여줄 만큼 아메드도 루이즈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러나 율법에 갇힌 삶을 사는 아메드는 결국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루이즈를 사악한 불신자라며 밀쳐버린다.

 아메드는 엄마, 누나, 루이즈가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 모든 탓을 이네스 선생님에게 돌린다. 그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잠재우고자 다시 이네스 선생님을 죽이려는 계획을 실행한다. 사회복지사 선생님을 따돌리고 도망쳐 나와 이네스 선생님의 창문으로 침입하려고 하지만, 결국 그의 계획은 실패하고 바닥으로 추락한다. 온몸을 꼼짝할 수 없을 정도로 다친 아메드는 이네스 선생님을 해치려던 도구로 자신을 구해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소리를 듣고 달려 나온 이네스 선생님의 손을 먼저 붙잡은 것은 아메드이다. 그는 이제야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말한다.


 아메드가 혐오의 대상을 선정하는 과정은 지극히 사회적인 과정이 동반된 것이다. 아메드가 자신의 삶의 불안에 대해 질문하였을 때, 누군가가 이네스 선생님을 끌어와서 만든 억지 답을 넌지시 알려주는 방식으로 말이다. 아메드가 이네스 선생님이 정답이냐고 다시 물으면 비겁한 어른들은 결과에 따라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결과가 좋으면 희미하게 던진 그것이 답이었다고 말하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고 잡아뗀다. 그러나 삶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아메드의 삶도 이네스 선생님 하나로 해결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부디 이 세상의 모든 아메드가 이것을 깨닫게 되기를.

  

 아메드의 이슬람 율법을 다른 것으로 바꾸면 다양한 형태의 혐오가 생성된다. 우리는 나의 삶에 찾아온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희생양을 찾아왔다. 희생양을 골라내는 과정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음에도 서로가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속삭이며 위안했다. 나는 나를 혐오하는 사람을 위하여 얼마나 기다려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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